[천동성 전 교도관] 소년원에서 청송교도소까지, K의 교도소 인생

  • 등록 2025.02.12 17:51:37
크게보기

 

 

대전교도소에서 야간 2팀 부당직 업무를 볼 때였다. 부당직은 새벽 2시에 당직을 교대해 아침 6시까지 소 전체를 책임지는 일을 한다.

 

그날 새벽 5시쯤이었다. 60여 명이 3,200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장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난 듯했다. 가석방 특혜 등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할 정도로 한여름의 취사장 출역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간간이 출역을 거부하는 수용자들도 있다.

 

그날은 수용자 A와 반장 사이에 일이 있는 듯했다. A가 작업거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장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계속 출역을 거부하고 혼자 조사실에 간다니 A를 조사 수용시키라며 남 일 이야기하듯 말했다. 나는 다툼을 한 사람을 같이 보내야 하니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제야 반장은 머뭇거리며 두 사람을 화해시키겠다고 했다.

 

수용자를 조사 수용시키는 일은 교도관 입장에서 시간 낭비도 줄이고 일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방법이지만 나는 그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힘든 출역을 한다는 건 가석방 출소를 기대한다는 것일 텐데, 이번 일로 징벌을 받으면 그 혜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A가 마음을 잡고 취사장 일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온 소내가 술렁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취사장이었다. 개봉하지 않은 담배 몇 갑이 취사장 한구석에서 발견된 것이다.

 

알고 보니 취사장에서 나오는 잔밥을 가져가는 업자가 담배를 넣어줬고 이것을 받은 수용자가 새 장화에 넣어 숨겨둔 것이 발각된 것이다.

 

담배를 발견하고 신고를 한 인물이 바로 A였다. 동료와 다투고 출역 거부를 하던 그가 어느덧 성실하고 믿음직한 수용자가 되어 있던 것이다. 출역 거부 건으로 A를 조사 수용하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만약 그랬다면 A는 취사장에 적응을 못 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된다면 담배가 발각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조사방은 수용자들의 의욕을 꺾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절망감까지 안겨 교도소에 적응하기를 방해하는 곳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는 수용자들을 그곳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었다.

 

20대 중반이었던 현실(가명)의 경우도 그랬다. 현식이는 182cm의 키에, 온몸에 문신이 뒤덮여 있어 조직폭력배처럼 보였지만 눈망울이 선한 게 평소 말도 없고 성실한 수용자였다.

 

어느 날 현식이와 같은 작업장에 있는 40대 Y가 현식이가 자신에게 욕을 한다며 처리해 달라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현식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Y가 자신을 조사방에 보내려고 작업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화가 났던 것이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욕을 하면 되겠느냐고 현식이를 좋게 타일렀다. 그날 이후 현식이를 다시 만난 곳 은 교도소 내 천주교 교회당이었다. 종교 행사에는 전혀 참석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어떤 일인지 와있던 것이다.

 

어떤 종교든 관심을 두고 행사에 온다는 건 교화의 시작이고,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일 수 있었다. 나는 출소일이 얼마 남지 않은 현식이가 건강한 사회인로 돌아가 다시는 교도소에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교도관으로 오래 근무하다 보면 자꾸만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수용자들도 만난다. K처럼 말이다. K처럼 평생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 사는 사람들을 선배들은 ‘교도소형 인간’이라고 불렀다.

 

"제가 징역 산 걸로 따지면 교정계 역사입니다. 소년원에서 청송까지 보호감호도 살았잖아요.”

 

60대 후반의 수용자 K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입담이 여전했다.

 

대퇴부 골절로 외부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간도 안 좋고 대장에도 이상이 있어 어디서부터 치료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한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소년원에 들락거리기 시작해 성인 교도소까지 수용되기 시작했고,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탓에 보호 감호형도 선고받았던 K였다. 오죽하면 연고지 교도소에 수용될 때마다 교도관들이 ”또 들어왔어?”라고 인사를 할 정도였을까. K가 마지막으로 출소했을 때 분명 장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렇게 온몸이 망가진 상태로 다시 누워있을 줄은 몰랐다.

 

“다시는 안 들어오려고 했는데 창피해 죽겠시유.” K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출소 후 붕어빵 장사로 건강하게 살아보려던 그의 노력은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사태로 물거품이 되었다.

 

아내는 가출했고, 하나 있던 아들은 아내의 가출 후 극단적 선택을 해 돌봐줄 가족도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K는 결국 인생 막바지에 이르러 기거할 곳으로 교도소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무기수가 아님에도 소년원에서 소년교도소, 성인 교도소에서 청송교도소 그리고 보호감호까지 40년을 넘게 대한민국 교도소의 역사와 함께 한 K. 교도소에 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그를 생각하자니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K에게는 교도소가 유일하게 자신을 보살펴주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수용자들의 교정과 교화를 담당하고 돕는 직업 교도관으로서 그를 대했지만, 속으로는 생의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침상에 누워있는 K의 고단하고 불행했던 삶에 작은 위로를 건넸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다.

 

천동성 교도관 cjsehd@naver.com
Copyright @더시사법률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