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두고 지나온 교도관 생활을 되돌아보니,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있었지만 그래도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은 남아 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 해소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업 팀장을 할 때 유독 인상적인 수용자가 있었다.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출역해 성실하게 일하고 모범적인 수용 생활을 하던 무기수 K다. 외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인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자 청부살인을 저질렀고 그 대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온 후 23년간 단 한 번의 징벌도 없이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해 왔고 전임 작업 팀장도 K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인수인계를 할 정도였다.
내가 작업팀장으로 있을 때도 K는 무척 성실하였고, 내가 자리를 운영지원팀장으로 옮기고 1년이 다 되어갈 때도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79세가 된 K는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공장에 열심히 출역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K를 교도소에 그대로 두고 퇴직한다는 것은 교도관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단 하나의 소망을 꼽으라면 아마도 가석방일 것이다. 형법상 무기수 가석방 요건은 20년 이상 복역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25년이 지나야 신청이 가능했고, 실제로 허가를 받으려면 30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K의 경우는 85세가 넘어서야 가석방이 가능한 상태였다.
나는 우선 작업팀장에게 K를 면담하겠다고 알린 뒤, 그의 가석방 가능성을 꼼꼼히 점검해 보기로 했다. 가석방 요건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재범위험성이라 가족관계와 보호해 줄 사람, 출소 후 생활 여건이 중요한데 K의 경우 아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고, 출소 후 본국에서 정착해 생활할 수 있는 환경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수용생활 중 단 한 차례의 징벌도 없이 모범적으로 생활하여 가석방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실무상 가석방은 30년이 지나야 허가되고 있다는 사실이 유일한 문제였다.
소년교도소 근무 시절, 나는 가석방 제도의 모순을 깊이 연구한 적 있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쳤고, 그 누구보다도 가석방 심사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무원 사회의 경직성과 무사안일주의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일선 실무자들에게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시도해 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가석방 주관 부서장인 법무부 분류심사과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범적으로 수용생활을 하고 있는 K가 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남은 여생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정의 역할이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가 가석방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장인 법무부차관 앞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답장이 도착했다. “퇴직을 앞둔 시점에도 끝까지 교도관으로서 사명을 완수하려는데 경의를 표한다, K의 가석방을 적극 검토해 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답변에 다음 가석방 심사에는 K가 올라갈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로 두 달이 지났음에도 소식이 없었다.
분류과 직원에게 알아보니 본부에서는 K를 왜 가석방 신청 대상으로 안 올렸냐 물었고, 직원은 지침에 25년 이상 되어야 올릴 수 있는데 K는 24년밖에 안 되어 안 올렸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혹시 책임질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 서로 일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담당계장은 나를 직접 찾아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모든 상황을 내내 지켜보다가 말을 꺼냈다. “정해진 틀에 맞춰 일하는 것은 초등학생을 시켜도 잘한다.
지금까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수용자 가석방 탄원서를 법무부차관, 분류심사과장에게 보내는 교도관을 본 적이 있나? 일선 실무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가석방 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차관님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는데 왜 올리지를 않느냐?” 나는 결국 격앙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우리 소 분류과장에게 K의 가석방에 대해 메일을 썼다. 정중한 어조를 유지했지만 문장 곳곳에는 억누를 수 없는 답답함과 분노도 담겨 있었다. 이 메일은 인쇄되어 소장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소장은 조금 더 지켜보자고만 했다. 그의 임기는 겨우 두 달 남았을 때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권한 있는 사람들이 책임이 두려워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결국 퇴직하기 한 달 전, 나는 신임 교정본부장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그것이 내가 K를 위해 교도관으로서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교정 현장을 떠났다.
그로부터 두 달 뒤, K의 가석방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퇴직 직전까지 여기저기 해두었던 일들이 끝내 하나로 매듭지어진 모양이었다. K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나 역시 속이 후련하고 기뻤다. 마음 한구석을 늘 짓누르고 있던 마지막 사명을 다한 기분이었다.
나는 가슴 속 한구석에 남아있던 짐을 덜었고 K가 남은 여생을 잘 보낼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