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이 만든 스타, 강원도 산골소녀 영자의 비극

  • 등록 2025.03.21 16: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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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피살된 父 재산 10만 원뿐
“세상이 무섭다”며 속세 떠나…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깊숙한 산자락.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외딴 마을에 한 부녀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영자양과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 캐기로 생계를 이어갔다. 딸 영자는 초등학교 문턱을 잠시 밟았을 뿐 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일상은 1997년 오지 취재를 하던 사진작가의 방문을 계기로 외부에 알려졌다.  오지 전문 사진작가 이지누씨는 부녀의 집에 몇 차례 방문하며 그들과 친분을 쌓았고, 부녀의 이야기를 1999년 한 잡지에 기고했다. 이를 계기로 방송국들이 영자 부녀를 찾아 나선 끝에,  2000년 7월 KBS '인간극장'이 산골소녀 영자와 그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5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했다. 

 

다섯 편에 걸친 다큐멘터리는 도시 시청자들의 감성을 강하게 자극했다. 자연과 함께 지내는 부녀의 순수하고 소박한 모습이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고 방송 직후 후원금과 생필품이 전국에서 답지했다. 산골소녀 영자는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도 출연하며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채 하지 못했던 영자는 후원자들의 지원으로 서울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됐다. 

 

그러나 부녀의 삶을 둘러싼 변화는 순탄하지 않았다.  영자의 아버지는 이러한 변화에 거부감을 보였다. 실제로 다큐멘터리에는 영자의 상경 결심에 아버지가 "영자는 산골을 벗어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강경하게 반대하는 모습이 그대로 송출됐다. 그러자 방송 제작진들이 나서  “딸의 인생을 망칠 일 있냐”며 설득하는 모습이 방송에 담기기도 했다. 

 

부녀에게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01년 2월, 영자의 아버지가 거주하던 집에서 돌연 숨진 채 발견됐다. 영자의 큰 아버지가 먼저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아버지의 사인을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로 보고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영자가 아버지의 시신에서 깊은 상처를 발견했다. 왼쪽 쇄골 부위에 남겨진 것이었다. 상처를 확인한 경찰은 수사의 방향을 살인 사건으로 바꿨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13일, 용의자를 체포했다.  범인으로 검거된 양씨(당시 53세)는 7번의 강도·절도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교도소 수용 중 방송을 접하고 부녀에게 후원금이 많을 것으로 추정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출소한 양씨는 영자 부녀의 산골 집을 두 차례 답사한 뒤 영자의 아버지가 혼자 머물던 집에 침입했다. 영자의 아버지를 흉기로 위협하며 돈을 요구하다 아버지의 왼쪽 쇄골을 찌른 뒤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온 집을 샅샅이 뒤진 양씨가 손에 쥔 돈은 12만원 남짓이었다.  그는 훔친 10만원 짜리 수표를 노래방에서 사용하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영자 아버지의 장례는 친척들의 도움 속에 치러졌다.  영자는 아버지를 고향 인근에 안장하려고 했지만 친척들은 화장을 권유했다. 결국 아버지의 유해는 고향 길가에 뿌려졌고, 위패는 삼척의 한 사찰에 봉안됐다.  하지만 영자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불과 보름 뒤,  영자의 후원회장이었던 김모씨가  영자의 광고 출연료와 후원금 700만원을 유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영자는 세간의 소란과 단절하고자 출가를 선택했다. 영자가 절에 들어가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녀의 과거를 반복해서 소환했다. 한 출판사에서 "고인의 뜻을 이어 유고 시집을 출간한다"고 발표하며 영자 아버지의 유고 시집 출간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다. 한 시인이 "이 시집은 내가 창작한 것"이라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사실관계가 드러났다. 

 

 

 

속세를 떠난 영자는 ‘도혜’라는 법명을 받고 삼척의 한 암자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몇몇 언론이 그녀를 다시 찾고싶어 했지만 한 스님은 “도혜 스님은 외부 접촉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밝히며 "잘 지내고 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여전히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고 전했다. 

이소망 기자 somang@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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