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에서 피해자의 진술조서는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진술이 작성됐다는 사정만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작성 당시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이른바 특신상태가 객관적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해자 진술조서는 원칙적으로 법정에서 진술자를 상대로 반대신문이 이뤄진 경우에만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사망이나 질병, 소재불명 등으로 법정 진술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이 인정되지만, 이 경우에도 특신상태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대법원은 특신상태에 대해 진술 내용의 신빙성과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 정황이 존재해 허위가 개입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진술이 일관되거나 그럴듯하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며,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엄격한 입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기준은 최근 판결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특수절도 등 혐의로 기소된 우즈베키스탄 국적 유학생 A씨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같은 국적의 유학생 B씨의 주거지에서 여권과 통장을 가져가고, 이후 공범과 함께 폭행을 가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에서는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해자 진술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가 문제 됐다.
B씨는 사건 직후 경찰에 신고하고 진술조서를 작성했으나, 법정에서는 증인신문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차례 출석했지만 신문이 진행되지 못했고, 이후에는 출석하지 않아 반대신문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1심은 진술 내용에 모순이 없고 허위 개입 가능성도 낮다고 보고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법정에 출석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출입국 기록상 해외 체류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고, 연락 가능한 정보도 존재했던 점 등을 근거로 수사기관이 출석 확보를 위한 충분한 조치를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통역 오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피고인이 수사 초기부터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해 온 점 등을 고려할 때 반대신문 없이 조서를 증거로 사용할 만큼 특신상태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해당 조서를 제외하면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판단에 법리 오해가 없다고 보고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진술자가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는 사정은 검사가 입증해야 하며, 조서 역시 허위 개입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엄격하게 증명돼야 한다는 기존 법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반대신문권 보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형식적으로 기회를 부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방어권이 행사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다.
법무법인 청 곽준호 변호사는 “수사기관 작성 조서를 주요 증거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반대신문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됐는지가 중요하다”며 “특신상태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면 해당 조서는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한 판결”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