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전국 교정기관에는 집시법 위반 등으로 수용된 대학생 공안사범들이 많았다. 그들은 독거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6사동 중층과 상층독거실 1,2,3방이 그들의 수용거실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혼거수용을 할 수 없는 소년수용자들이 그 방에 독거수용 되었고, 2010년 천안교도소가 외국인 및 한국인 성인교도소로 기능 전환되며 BBK 사건으로 유명한 미국 국적의 김경준이 6사 중층 독서실에 수용되었다.
BBK 사건은 당시 대통령이던 MB와 관련된 사건이라 김경준과 관련된 일은 상급기관인 교정본부나 법무부에서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기자들이 친지를 가장해 김경준과 접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원실에서 기자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김경준과 접견을 허용하였고 이 사실이 알려지며 대전청에서 우리 소 관련 직원들을 밤 11시가 넘도록 조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당시 소장님이 좋은 분이라 직원들을 질책하는 대신 다독이고 격려했지만 관련 직원들에 대한 문책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있고부터 몇 달 지난 어느 날, 총무과 사무실 밖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70대의 노인이었는데 바로 김경준의 어머니였다. 김경준이 피부암의 일종인 기저세포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왔다는데, 아들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 시켜야겠다고 소리치는 중이었다.
총무과장은 천안에도 대학병원이 2개나 있으며, 이곳에서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노인은 세브란스병원만을 고집했다. 수용자가 병원 입원 및 수술을 하게 되면 직원들이 몇 명씩 교대로 근무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하게 된다면 직원들의 어려움은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노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자 총무과장은 소장님께 보고하러 자리를 비웠고, 그사이 내가 김경준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소리치던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기품 있는 노인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아들을 미국에서 상위 몇% 안에 드는 인재로 키워냈는데 한국에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으니 어머니로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와 서로 존중하며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국의 교정기관의 현실과 우리 소의 입장을 전달하자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들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시키겠다는 의지만은 굽히지 않았다.
수용자가 다른 지역으로 수술할 경우엔 상급기관의 허가가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김경준의 세브란스행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일반 수용자들과 똑같이 처우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법무부에서 허가가 내려왔고, 직원들이 서울까지 올라가 며칠간 숙박업소 신세를 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김경준에 대한 기억으로 그가 새벽 4시쯤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부터 떠오른다. 보안과에 들어가 야간근무를 할 때 종종 목격하던 모습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와 대화 해보면 상당히 해박하고 표현력이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게 준 인상과는 별개로 김경준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말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고, 한 사람은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갇혔으니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뉘는 것도 당연했다. BBK 주가조작 사건은 두 사람 모두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건이었다. 재판부의 결정이 어떻든, 대한민국의 가장 큰 사기꾼을 누구로 생각하는지는 각자의 개인적 판단에 맡길 문제였다.
2015년 교감으로 승진해 대전교도소로 전출을 갔을 때, 한 직원 내게 와서 한 자가 교도소가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교정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한다고 알려주었다. 수용자가 교정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이긴 사례가 지금까지 한 건 있었는데, 그 사건을 샘플삼아 소송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정기관을 상대로 소송해 이긴 사람이 바로 김경준이었다. 김경준은 변호사 없이 직접 서류를 작성해 접견 관련 소송에서 승소했다. 김경준을 교과서 삼아 소송을 준비하는 수용자는 박채서였다.
박채서는 이름보다 흑금성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흑금성은 1990년대 중반, 대북 비밀 공작원이었던 박채서의 암호명으로,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대북 공작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2010년 이중간첩 행각이 발각되며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곧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라 했는데 그가 출소한 후 실제로 영화로 제작되었다. 황정민 주연의 “공작”이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교도관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