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파트너스] 감형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시작한다

  • 등록 2025.07.16 16: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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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반성한다’ 하지만
인생 고백하는 이는 많지 않아

형법이 허락한 마지막 감형 기회
제53조 ‘정상참작감경’에 대하여

 

나는 30년 동안 형사재판정 한복판에 서 왔다. 무수히 많은 재판을 거치며, 때로는 판결이 상당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피부로 느껴왔다. 형사재판정에서 판사는 혐의만을 본다.

 

그리고 대법원이 정한 범죄별 양형기준표에 따라 가중 또는 감경 사유가 있는지를 확인한 후 거기에 맞춰 형을 정한다. 그러나 판사도 인간이다.

 

피고인의 기구한 인생의 흐름, 고단한 삶의 궤적, 그리고 결국 그를 법정에 세운 배경이 변호사인 나까지 울릴 만큼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면, 나는 확신한다. 판사 또한 그것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왜냐하면 재판은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적용할 수 있는 조항이 형법 제53조, ‘정상참작감경’에 관한 규정이다. 형법 제53조는 단순히 형량을 깎아주는 법적 장치가 아니다. 이 조항은 재판이 단죄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유심칩 판매·관리를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혐의를 받아,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나를 찾아온 의뢰인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포항 사람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아들을 위해 먼 길을 달려 내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아마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피고인은 이미 동일 범죄로 벌금형과 집행유예 처분을 두 차례나 받은 전력이 있었고, 이번 범행에서는 자신이 관리하는 유심칩이 범죄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담했다.

 

아직 범행과 관련된 피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덕에 1심에서 비교적 낮은 형량을 선고받았지만, 처벌이 가볍다고 판단한 검찰에 의해 항소를 당한 상태였다.

 

반성문과 탄원서는 이미 충분히 제출되었고, 피해자와의 합의를 통한 양형 자료 확보도 불가능했다. 항소심에서 형이 더 높아지지만 않아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넨 뒤, 차분히 대화를 나누며 이 같은 상황을 설명드렸다. 그런데도 그는 부디 방법을 찾아 달라며 사건 수임을 간곡히 요청했다. 우선 아들을 만나보겠다고 하고 교도소 접견실로 향했다.

 

마주 앉은 청년은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고, 어딘가 지쳐 보였다.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왜 두 차례나 처벌을 받고도 같은 범행을 반복했는지, 포항에 살던 그가 어쩌다 대전까지 오게 되었는지였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부모와의 반복된 갈등 끝에 가출했고, 이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며 인생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한 자살 충동, 단체 자살 시도, 그리고 길거리 노숙. 그는 한 끼 식사로 컵라면 하나를 먹으며 며칠을 버티고, 세상과 단절되어 버려진 채로 살아왔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자신을 돌볼 삶의 여력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자, 항소심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분명했다. 피고인의 기구한 인생 여정을 재판부에 진심을 담아 소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통했다. 항소심 공판기일, 재판장은 피고인을 향해 무려 20분 넘게 설교를 했다. 내용은 다름 아닌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설득이자 경고였다.

 

그렇게 다가온 선고기일, 재판장은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면서 형법 제53조에 따라 정상참작감경을 적용해 형량을 절반으로 줄여주었다. 항소심 판결문에는 감형에 대한 양형 사유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 말은 곧, “내 마음이 움직였다.”라는 뜻이었다.

 

법정은 죄를 판단하는 곳이지만,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항소심은 사실심의 마지막 단계로 피고인의 인생 전체를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단순히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이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말을 재판부가 듣게 만드는 것이 변호인의 역할이다.

 

나는 오늘도 항소심 법정에 선다. 단순히 집행유예나 감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피고인의 삶에 있어 한 치의 억울함도 없도록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서다. 그것이 변호사의 본분이며, 책임이자, 소명이다.

백홍기 변호사 CHB@T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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