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빛났을 때(경북북부제1교도소)

  • 등록 2025.08.09 18: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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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나는 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선택적 함묵증을 앓았다. 친구와 선생님의 말에 고갯짓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소통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연스럽게 ‘벙어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벙어리가 아니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내뱉을 수 없었다.

 

가시방석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면 더 가시 돋친 말이 오갔다. 부모님의 몸과 마음에는 멍과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아빠는 엄마가 한 말과 행동을 내게 폭로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을 했던 아빠는 가게를 닫은 채 하루 종일 집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욕설을 내뱉으며 소위 한바탕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 상황이라 내게도 멍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집에서도 벙어리 신세인 나 자신이 미워서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돈도 없거니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찾으러 온 아빠가 내 팔목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짧은 가출은 그렇게 끝났다.

 

밖에서 ‘예', ‘아니요’ 같은 간단한 의사 표현도 하지 못했던 나는 부모님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랑 이혼하면 좋겠어” 나의 눈시울보다 빨간 김치 냉장고 앞에 앉아 있던 엄마가 답했다.


“다 너를 위해서야” 아빠 없는 자식으로 키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를 위한다면서 매일 밤 베갯잇을 적시며 ‘고통 없이 죽는 법’ 따위의 질문을 검색하게 했다. 내 생애 지금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이제 막 한바탕을 시작했겠지만 나는 이미 학교에서 한바탕을 하고 온 뒤였다. 집에는 더 큰 폭풍이 일었으므로 나는 안식처 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도서실이었다. 도서실은 벙어리들 천지였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와중에 얕은 숨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언뜻 들릴 뿐이었다. 책을 열면 온통 이야기 세상이었다.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나의 말소리를 닮아 있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도서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벽에 붙은 교내 백일장 포스터를 봤다. 참가 신청서를 소중히 챙겨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공책에 시를 쓰며 놀았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글로 쓰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백일장에서 상을 탄 뒤론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학년이 끝날 때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돌려 써주는 편지에 ‘말 좀 해’ 같은 말이 아닌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아’ 하는 칭찬이 적히기 시작했다.

 

고백적 글쓰기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덕분에 지난날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불화를 보며 사랑을 불신했지만 지금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외로웠던 내 어린 시절을 토닥이며 나를 아프게 한 모든 것을 용서했다.

 

희로애락을 전부 끄집어낼 수 있게 해 준 문학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문학으로 나와 독자들을 치유하고 공감케 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그 시절 ‘벙어리’였어도 좋았다.

채수범 기자 CHB@T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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