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보이스피싱 피해 ‘무과실 배상’ 법제화 추진…금융권 강한 반발

  • 등록 2025.09.01 10: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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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회사 책임 범위 확대 논란...
은행권 “범죄 대응 책임 전가” 반발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해 은행이 과실이 없어도 일정 부분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서 책임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현행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 제1항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접근매체의 위·변조나 해킹 등 부정하게 취득한 정보를 이용한 사고로 고객에게 손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

 

이 규정은 금융회사의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책임을 인정하는 ‘무과실 책임’ 성격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다만 이용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책임이 제한될 수 있다.

 

이 같은 법 체계에도 불구하고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금융회사에 보다 넓은 범위의 배상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방안은 인공지능(AI) 기술과 심리 조작 방식인 이른바 가스라이팅이 결합되면서 보이스피싱 수법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피해자 보호 장치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금융위원회는 “기술력을 가진 금융회사가 이상 거래를 보다 적극적으로 차단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는 해외 사례도 근거로 제시했다. 영국은 지난해부터 송금은행과 수취은행이 보이스피싱 피해액을 절반씩 부담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는 은행을 1차 책임 주체로 두고 통신사를 2차 책임 주체로 두는 방식의 책임 분담 구조를 마련했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정책 방향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은 본질적으로 검찰과 경찰이 해결해야 할 범죄 문제”라며 “수사기관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범죄를 금융회사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피해자 설득 과정의 어려움도 지적된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의심 계좌로 연락해도 피해자가 이미 가스라이팅된 상태라 ‘내 책임이니 송금해 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며 “은행 직원이 몇 시간씩 설득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은행권에서는 정책 설계 자체가 충분한 검토 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피해자의 ‘무과실’을 어떻게 판단할지, 통신사의 책임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2금융권까지 동일 기준을 적용할지 등 핵심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구체적인 배상 한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금융권과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정책 타당성부터 논의해야 하지만 새 정부 기조에 금융권이 공개적으로 이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현행 법 체계에서는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금융회사 책임이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와 제10조는 접근매체의 위조·변조, 전송·처리 과정의 오류, 정보통신망 침입 등을 통해 이용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금융회사 등이 배상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용자가 비밀번호나 보안카드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는 등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금융회사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

 

실제 보이스피싱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속아서 직접 송금을 하는 경우가 많아 법원이 이용자의 중대한 과실을 인정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금융회사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피해금 회복은 별도의 절차를 통해 이뤄진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은 피해 신고가 접수되면 금융회사가 해당 계좌를 지급 정지하고, 금융감독원의 공고 절차를 거쳐 피해금을 환급하는 구조를 두고 있다.

 

즉 금융회사가 직접 손해를 배상하기보다는 사기 이용 계좌를 동결하고 남아 있는 자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다.

 

다만 계좌 명의인이 이의를 제기하면 지급 정지와 환급 절차가 종료될 수 있어 피해금 회수가 어려워지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금융회사가 지급 정지나 환급 절차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문제된 판결도 있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제도 논의가 기존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라는 평가도 나온다. 지금까지는 금융회사의 명백한 과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피해자가 손실을 떠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금융회사에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일정 부분 배상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이 도입될 경우 금융권 부담 증가와 도덕적 해이 가능성 등 새로운 논쟁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박보라 기자 violet0218@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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