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수거책’ 무죄…“범행 인식 증거 없다”

  • 등록 2025.09.01 10: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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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거·전달 행위만으로 처벌 어려워

 

보이스피싱 범행에서 현금이나 물건을 전달하는 이른바 ‘수거책’ 역할을 맡았다가 형사재판에 넘겨지는 사례가 이어지는 가운데, 범행 인식 여부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는 판단 기준이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11단독(정성화 판사)은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된 A씨(46)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단순히 결과적으로 범죄에 이용된 물건을 전달했다는 사정만으로는 피고인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는 SNS에 올라온 ‘퀵서비스 아르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연락한 뒤, 보이스피싱 범행에 사용된 체크카드를 전달한 혐의로 약식기소됐다. 당시 모집 글에는 ‘초보자 가능’, ‘당일 지급’ 등의 문구가 포함돼 있었고, 생활고를 겪던 A씨는 이를 단순 배송 업무로 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특정 메신저를 통해 지시를 받고 박스를 수거해 전달하는 일을 세 차례 수행했으나, 해당 박스에는 피해자들이 속아 보낸 체크카드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보수 수준과 업무 방식 등을 근거로 범행 인식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의 쟁점은 A씨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법원은 피고인의 진술뿐 아니라 외부에 드러난 행위 형태와 당시 상황 등 객관적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형사재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고, 유죄의 인정은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4도74 판결).

 

재판부는 “피고인이 체크카드 등 접근매체를 전달한다는 인식이나 의사를 가지고 박스를 운반했다고 볼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결과적으로 범죄에 이용됐다는 사정만으로 고의를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A씨가 물건의 내용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정황 등도 함께 고려됐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총책, 관리책, 유인책, 수거책 등으로 역할을 나누는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개별 가담자의 책임은 일률적으로 판단되지 않고, 각 단계에서 범행을 인식했는지 여부가 구체적으로 따져진다.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범행의 공모 여부는 연락 방식, 채용 경위, 업무 내용과 절차, 수거 횟수와 금액, 보수 지급 방식, 피고인의 연령과 경력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25도486 판결).

 

다만 모든 수거책이 무죄로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범죄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었는지 여부를 중심으로 책임 범위를 가른다. 수당이 지나치게 높거나, 전달 방식이 비정상적이고 은폐 정황이 있는 경우에는 범행 인식을 인정해 유죄로 판단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동정범으로 인정되지 않더라도,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을 알면서도 행위를 이어간 경우에는 사기방조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

 

전달 행위를 넘어 자금 이동이나 은닉 과정에 관여한 경우에는 범죄수익은닉 관련 혐의가 추가될 가능성도 있다.

 

법률사무소 로유 배희정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수거책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범행을 인식했는지 여부를 입증할 객관적 자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채용 과정, 업무 지시 내용, 대화 기록 등이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히 ‘몰랐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상적인 업무로 오인할 만한 사정이 있었는지가 함께 검토된다”며 “반대로 의심할 수 있는 정황이 반복되거나 은폐 시도가 확인되면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최희원 기자 chw1641@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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