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분쟁과 관련된 가처분 사건에서 재판부 요구에 따라 입주자 개인정보가 담긴 자료를 제출한 행위가 형법상 정당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제1부는 지난 7월 18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사건에서 유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사건은 2020년 대전 서구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입주자대표회의 해산 분쟁에서 비롯됐다. 당시 일부 주민들은 관리비 절감과 관리 운영 개선 등을 이유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아파트 관리규약을 근거로 입주자대표회의 해산 결의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비상대책위원회 측은 총 940세대 가운데 606세대의 서면 동의를 받았다며 기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동대표들을 상대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등 동대표 측은 무효이거나 철회된 동의서를 제외하면 해산 결의에 필요한 과반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맞섰다.
가처분 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은 서면 동의자의 실제 거주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세대주와 세대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아파트 동대표회장이었던 A씨는 관리소장과 함께 관리사무소에 보관돼 있던 입주자 카드 584장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자료에는 세대주 생년월일, 직업, 차량번호, 가족사항, 세대원 생년월일, 전화번호, 주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삭제된 상태였지만 입주민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법원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A씨를 기소했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원칙적으로 정보주체의 동의가 있거나 법률에 근거가 있는 경우에만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개인정보를 처리하거나 처리했던 사람은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누설하거나 권한 없이 다른 사람이 이용하도록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해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거나 업무상 개인정보를 누설할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1심과 항소심은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A씨의 행위를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의 자료 제출 요구가 있었더라도 입주민 동의를 받지 않은 채 개인정보를 제출한 행위는 개인정보의 제3자 제공 및 누설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건의 법적 구조를 달리 봤다. 대법원은 “재판 과정에서 소송상 필요한 주장의 증명이나 방어권 행사를 위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자료를 법원이나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경우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형법 제20조에 따른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여부만 기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해당 행위가 재판 절차에서 불가피한 범위의 행위였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정당행위 여부를 판단할 때 ▲개인정보를 수집·보유하게 된 경위 ▲제출 목적과 상대방 ▲목적 달성에 필요한 최소 범위인지 여부 ▲비실명화 등 보호조치 여부 ▲정보의 성격과 양 ▲정보주체에게 미치는 침해 정도 ▲다른 대체 수단의 존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했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에 비춰볼 때 A씨의 행위가 사회상규에 위배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가처분 사건의 핵심 쟁점이 입주자대표회의 해산 결의에 필요한 정족수가 충족됐는지 여부였다는 점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가처분 사건의 주된 쟁점은 입주자대표회의 해산 결의에 필요한 정족수가 충족됐는지 여부”라며 “입주자카드는 서면 동의서 등을 작성한 사람이 실제로 해당 아파트에 거주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소송상 주장을 소명하기 위한 자료이자 재판부가 제출을 요구한 자료의 성격을 가진다”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 아파트의 세대수 등에 비춰볼 때 2주일의 기간 내에 정보주체인 입주자들로부터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개별 동의를 받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며 “피고인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삭제함으로써 침해 위험성이 큰 정보에 대해서는 일정한 보호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입주자 카드에 기재된 정보는 세대주나 세대원의 특정에 필요한 범위의 정보에 불과하고 사상·신념이나 정치적 견해, 건강정보 등 민감정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며 “개인정보를 제공받은 제3자가 공공기관의 지위에서 사건을 심리하는 법원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주민들에게 사회통념상 용인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파트 관리와 관련된 공익적 측면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입주자대표회의 해산 여부는 아파트 운영과 관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사안으로 다수 주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최소한의 개인정보 활용까지 허용되지 않는다면 해산 결의 효력 판단이 곤란해져 사회적·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여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결국 원심이 정당행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보고 판결을 파기했다. 사건은 다시 대전지방법원에서 심리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