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예문정앤파트너스] 변호사의 일기 (5)

  • 등록 2025.10.06 18: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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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혼자 집에 돌아가서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해서 고소나 소송을 할 용기와 의지를 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 심리적 과정도 나와 상의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법적인 문제도 아니고 당사자 본인의 내면적 세계 안에서 정리해야 하는 문제라서, 변호사로서는 개입하기도 어렵고 개입할 필요 없이 당사자에게 결심해서 결론만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분들이 내 의뢰인이 되면 그런 고민의 과정도 내 사무실에서 함께 해드리고자 한다. 그럴 때는 더 이상 해드릴 법적 조언은 없는 대신, 나는 정신 분석가가 내담자의 말을 경청하듯이 듣고자 애쓴다. 나는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한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를 쓰는 2년 동안 실제로 정신 분석을 받았다. 네덜란드 국제 재판소에 파견 갔을 때에도 융 계열의 분석가에게 1년 반 동안 정신 분석을 더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가 직접 분석가가 되어 보려고 트레이닝 과정에 들어갔지만 본업으로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아져서 중도에 하차했다.

 

정신 분석가는 내담자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며 편들거나 섣불리 내담자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면서도 내담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윤리적으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정신 분석가가 곁에서 지지해 주는 덕분에 내담자는 바다로 뛰어든 다이버처럼 점점 더 깊은 내면의 공간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된다(나는 이번에 길리섬에서 생애 첫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했는데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숙련된 현지인 파트너 ‘안안’이 곁에서 잘 이끌어 준 덕에 바다 밑바닥에서 거북이와 나란히 헤엄을 치기도 했다). 

 

내담자가 갈림길에 서 있을 때 분석가는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내담자 스스로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준다. 그 힘은 상대를 깊이 존중하는 가운데 적절한 반응과 지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평가를 해 줌으로써 생겨난다. 내가 변호사로서 상담자나 의뢰인의 입장을 들을 때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정신 분석가 같은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윤리적으로 날카롭게 판단하지 않고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편들지는 않는다. 내가 감히 당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조급해하지 않고 기꺼이 들어드리겠다, 듣되 선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당신의 불행을 내 행복의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겠다, 그저 내 마음속 서랍에 고스란히 담아 두었다가 당신이 민망할 때쯤 깨끗이 잊어 주겠노라는 마음으로 들으려 한다. 

 

이렇게 주의 깊게 들어드리는 것 자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자체가 묘한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들어주고 있으면 의뢰인은 어느 순간 용기와 의지가 충전되어 스스로 실행을 하겠다고 말하게 된다.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분들은 나에게 “변호사님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라고 묻기도 하신다. 그러면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살아온 방식과 나의 기질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꼭 맞는 방법인지는 스스로 판단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린다. 그렇게 하면 자신은 도저히 할 수 없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면 그 입장을 그대로 존중해드린다. 오래 생각해 보고 마음이 바뀌면 또다시 찾아오시라고 한다. 그러나 다수는 결국 내가 권하는 방법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나를 믿어주는 것이다.

 

의뢰인 중에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나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없이 그저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고 두려운 분들도 적지 않다. 자식이나 부모가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본인이 갑자기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자식이나 배우자가 갇히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송이 진행되던 중에 본인이나 가족이 중병에 걸리거나 하는 일들도 적지 않다.

 

나는 그런 경우에도 그냥 사무실에 와서 차를 한잔하고 가시라고 한다. 밥을 사 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오시면 대개 나는 그분들의 말씀을 경청해 드린다. 그러고 나면 돌아가실 때는 한결 표정이 밝아져서, 마음이 가벼워져서 돌아가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을 떠난 자식이 자꾸 생각나서 괴로워하는 부모는 산책을 나와서 별일 없어 사무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가시곤 한다. 

 

대부분 나는 그저 듣기만 하고 그분들이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에 호응을 해드린다. 내가 말하더라도 법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소소한 일상을 회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냥 요즘 내가 먹은 음식, 구경한 장소, 우리 또래들의 관심사, 재미난 유튜브 채널 같은 것을 말씀드린다. 그러면 그분들도 과거 젊었을 때 가졌던 취미나 자주 하던 운동 이야기, 옛날에 보던 채널, 그분 또래들의 관심사나 건강 상태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시며 조금씩 자주 미소를 보인다. 떠날 때는 마음이 후련하다고 하고 가신다.

 

얼마 전에는 남편이 수감되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고 있는 배우자분이 찾아왔다. 전화 통화를 할 때 너무 불안해하셔서 내가 먼저 오시라고 했다. 법적으로 행여 자신도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인지, 남편의 빚이 자식들에게 옮겨가는지 같은 걱정들도 털어놓았다. 남편의 범죄에 대해서 자신이 막지 못했다며 자책하기도 했다. 본인의 꿈이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내 말 내용은 별로 중요치 않다. 그분이 어디서도 하지 못하는 말들을 내 앞에서 쏟아낸 것이, 그 말을 내가 우호적인 입장에서 경청해 드린 것이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뒤에는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며 연락을 보내오셨다.

 

어떤 여성분은 세 번째 찾아왔는데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다. 처음에 왔을 때는 마치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먹구름이 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세 번째 찾아왔을 때는 “처음 변호사님께 전화했을 때는 사실 죽으려고 하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한 거예요. 변호사님이 사람 살리신 거예요.” 하면서 씩 웃기도 했다.

 

찾아오실 때마다 수술받은 정형외과 환자처럼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불안도 줄어들고 상대방에 대해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과도한 요구에 대해서는 못한다고 말할 힘도 생겨났다. 

정재민 변호사 CHDWO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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