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관계를 “철저히 이질화된 두 국가”이자 “완전히 상극인 두 실체”로 규정하며 대한민국과의 모든 대화 채널을 전면 차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며 미국이 비핵화 요구를 포기할 경우에 한해 북미 간 평화 공존 논의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제시해 한반도 정세에 미묘한 파장을 던졌다.
22일 노동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지난 20~2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 연설에서 “우리는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으며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을 “모든 분야가 미국화된 식민지 속국”이라고 폄훼하며 외세에 의존하는 대상과는 통일을 논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밝혔다.
특히 남북 관계를 국경을 사이에 둔 두 개의 국가로 법적 고착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부터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등의 역사를 거론하며 “이미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두 개 국가로 존재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2023년 말 선포한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헌법과 법률을 통해 제도적으로 완성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는 ‘영구적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김 위원장은 “핵 보유는 국가 생존을 위한 필수 선택이자 헌법적 명시 사항”이라며 “제재 완화를 위해 비핵화를 협상하는 일은 영원히 없고 비핵화 주장 자체가 위헌 행위”라고 선을 그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3단계 비핵화 구상’을 향해 “전임자의 숙제장을 옮겨 적은 복사판”이라고 맹비난하며 대화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군사적 긴장 수위도 높였다. 김 위원장은 핵무력 정책법령에 기초한 ‘제2의 사명(선제 타격)’ 가능성을 시사하며, “전쟁억제력이 가동되면 한국과 주변 동맹국의 군사 조직은 삽시간에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미국을 향한 유화적 제스처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다면 진정한 평화 공존을 논의할 수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고 이례적으로 친분을 과시했다. 이는 다음 달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참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 협상하겠다는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노골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이번 회의에서는 양곡관리법, 지적소유권법 등 경제 관련 법안들이 채택됐다. 김 위원장은 연설 말미에 러시아 쿠르스크 전선에 파병된 북한군과 유가족들을 향해 깊은 감사를 표하며 최근 긴밀해진 북중러 밀착 관계를 다시 한번 과시한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