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장미비디오 여주인 살인 사건... '나는 범인이 아니다'

  • 등록 2025.11.28 17: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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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팀 “12시간의 기적, 우연히 검거 후 자백 받아내”
이민형 “살인은 아냐…진범 잡을 기회 놓치게 해 죄송”
국과수 LMG와 루미놀 검사 진행, 이민형 혈흔 미발견

 

1998년 1월 3일 오후 3시 10분경, 대구 남구 대명11동의 한 비디오 대여점인 ‘장미 비디오’의 30대 여주인은 여섯 살 된 막내아들에게 짜장라면을 끓여주고 있었다. 평범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던 모자는 곧 들이닥칠 불행에 대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잠시 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성은 흉기를 휘둘렀고, 여주인은 13차례나 찔린 채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3시간 만에 숨졌다. 현장을 목격한 이는 어린 아들뿐이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인근 상점으로 달려가 “강도가 우리 엄마를 찔렀다”라고 외쳤다.


물증 없는 살인사건…경찰 “범인 자백 받아냈다”


수사는 곧바로 시작됐지만, 사건 현장에서는 지문이나 DNA, 흉기 등 결정적 물증이 확보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서는 아이가 떠올린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라는 인상착의뿐이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틀 뒤, 사건 현장 인근에서 불심검문을 받던 20세 청년 이민형씨가 체포했다.

 

그는 군 복무 중 탈영 상태였고, 경찰은 그가 탈영 후 대구 등지에서 여러 건의 강도·절도를 저질렀으며, 장미 비디오 가게 살인 역시 그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자신을 촬영하러 온 수많은 카메라 앞에 공개적으로 서게 된 이민형은 “누군가 알 거예요. 누군가는 알 거라고요”라는 말을 남겨 의문을 자아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는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 진술도 더해졌다. 범행 시간대에 이민형과 비슷한 옷차림의 남성을 봤다는 이웃, 인근 다방에서 이씨를 본 것 같다고 진술한 종업원 등이 등장했다. 군사법원 1심은 자백과 목격자 진술을 근거로 사형을 선고했다. DNA나 흉기와 같은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없었다. 항소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유죄 판단은 유지됐다.


“나는 진범이 아니다”…27년 만의 진술 번복과 강압 수사 의혹


시간이 흘러 2025년, 48세가 된 이씨는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인에 옥중 편지를 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나는 살해하지 않았다”며 당시 “수십 시간을 잠을 재우지 않는 조사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졌고, 범인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은 수사관들이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씨는 제작진에게 당시 조사 과정에서 형사들의 가혹행위와 성추행이 있었다고도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형사들은 방송에서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다만 취재 과정에서 한 수사관은 폭행이 있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재심 전문 박준형 변호사는 “여러 가혹행위 중에 옷을 벗게끔 해서 사진을 촬영했다는 것은 재심사유인 경찰의 직무상 범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배치되는 목격자 증언과 알리바이…혈흔 반응도 미검출


방송은 목격자 진술 간 모순도 짚었다. 피해자 아들은 법정에서 이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전문가들은 진술의 신빙성 검증이 충분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방송에 출연한 한 상담심리학자는 “아이가 마치 안전한 공간에서 TV를 보듯 상황을 봤다고 진술한 점은 이례적”이라며 주변 어른들의 반복적인 질문이 아이의 기억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씨는 항소심에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범행 시각 현장에서 6km 떨어진 만화방과 여인숙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지도로 확인해 본 결과 대중교통으로 40분, 걸어서 1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이씨가 방문했다고 주장한 만화방 장부에는 실제 이씨의 대여 기록이 작성돼 있었다. 실제 이씨의 대여 장부를 기록했던 만화방 주인은 본인 글씨체가 맞는 것 같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씨의 자백 내용 중 흉기 묘사가 피해자 아들의 진술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문제는 흉기의 실재 여부였다. 이씨는 병원에서 훔친 접이식 칼이라고 자백했으나, 해당 의사는 분실 사실이 없다고 했다. 법의학 감정에서도 “10cm 칼로 11cm 깊이 상처를 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또 다른 쟁점은 혈흔이었다. 당시 이씨 손톱에서 혈흔은 검출되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측은 이씨의 진술에 따라 유사 조건에서 재현 실험을 진행했다. 69시간이 지난 뒤 실시한 검사에서 MG 시약에서는 극미량이 검출됐고, 루미놀 시약에서는 참가자 모두에게서 혈흔이 확인됐다.

 

결국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범행 부재’ 혹은 ‘범행 존재’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결과가 제시됐다.

 

이씨는 현재 재심 청구를 준비 중이다. 그는 옥중 편지에서 “저로 인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 할 분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죄송하다”며 “진범을 단죄할 기회를 잃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소망 기자 somang@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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