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 보면 ‘이 흐름을 스스로 끊어버릴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삶이 한순간에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미래를 떠올리면 절벽 끝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년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추가 건으로 인해 다시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날 정신에 살짝 균열이 오더군요. 그 빈틈 사이로 대여 섯 가지의 불건전한 망상들이 팡파르를 울리며 돌진해 들어오는데 내 의지로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TV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명화 ‘흐르는 강물처럼’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봤을 때 20대 였는데 30년이 훌쩍 넘어 젊디젊은 브래드 피트와 다시 마주하게 됐습니다.
당시에 친구들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열광했었지만 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톰 크루즈에게 매료되어 있던 터라 브래드 피트의 미모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졌었 습니다. 덩달아 브래드 피트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화까지 흡사 간을 하지 않은 매운탕 같은 심심한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었죠.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TV 앞에 바짝 다가가 앉고 말았습니다. 젊음 속에 빛나는 그의 미려한 얼굴이 어찌나 잘생겼던지요. 거기다가 20대 때는 ‘발 연기 같다’라고 폄하했던 눈빛 연기에 나는 혼을 놓아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흐르는 강물 속에 낚싯줄을 던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버지와 함께 낚시하러 다녔던 내 유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어복이 있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매번 송사리만 낚는다고 어머니께 핀잔을 들으셨지만 아버지는 대어를 낚는 일보다는 낚시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제 눈에 그 모습은 흡사 바다의 신 포세이돈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많은 재산 을 물려줄 능력은 없지만 우리 딸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좋은 기억만큼은 무궁무진 하게 물려주마.” 영화가 끝나갈 즈음 제 마음은 다시 건강해져 있었습니다.
영화는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라’. 그 말은 순리대로 살란 뜻이겠지요. 안타깝게도 영화 속 브래드 피트는 순리를 거스르다가 젊은 나이에 살해당하고 맙니다. 나 역시 오십 중반에 순리를 거스를 생각을 얕게 했었습니다.
나는 지금 흐르는 강물 속에 나 자신을 담근 채 반복되는 수감생활이라는 폭포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신 좋은 기억들은 나라는 사람의 구석구석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다가 문득 그 추억 하나를 꺼내 보면, 영화 속 박제된 브래드 피트의 젊음처럼 그 추억들도 시들지 않은 채로 싱싱한 빛깔을 발산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