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카 스프레이로 타인 소유 회사 건물 외벽과 출입문에 ‘유치권 행사 중’ 등의 문구를 도배해 재판에 넘겨졌던 60대 남성이 항소심에서 벌금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판단이 항소심에서 뒤집히면서 재물손괴죄 성립 요건과 ‘피해자 승낙’의 범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주목된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김준혁)는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A 씨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벌금 50만 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피해자 회사 의사에 반해 건물 외벽과 출입문에 라카 스프레이로 낙서를 해 재물의 효용을 해친 사실과 고의가 모두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가 피해자 회사의 의사에 반한 것인지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회사 대표이사 B씨가 사전에 표시 행위를 허락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이에 따라 재물손괴의 고의도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건물 외벽과 출입문에 락카 도색 행위 자체가 미관과 사용가치를 현저히 훼손하고 원상회복이 쉽지 않아 ‘재물손괴’에 해당한다고 전제했다.
쟁점이 된 ‘피해자 승낙’에 대해서도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회사 대표 B씨가 A씨의 행위를 허락한 적이 없다고 했다가 다시 허락했다고 진술을 번복한 점을 들어, 해당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설령 B씨가 일정한 표시 행위를 허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거가 어려운 락카 도색까지 포함한 포괄적 승낙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또 항소심은 승낙 주체의 적격성에도 주목했다. 사건 당시 해당 건물은 피해자 회사 대표 B씨가 아니라, 회사 지분 20%를 보유한 C씨가 점유·사용하고 있었는데, A씨는 C씨로부터 아무런 승낙을 받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부는 “당시 이 사건 건물은 B씨가 아닌 C씨가 점유·사용하고 있었다”며 “피고인은 두 사람 사이에 회사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설사 B씨의 승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인이 자신의 행위가 적법하다고 믿는 데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는 위법성 조각 사유로서의 피해자 승낙은 처분 권한이 있는 자의 승낙이어야 한다는 형법상 법리에 따른 것이다.
항소심은 A씨의 법률상 착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유·운영권 다툼이 있는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제거 비용과 훼손이 수반되는 락카 도색이라는 강한 수단을 선택한 이상 자신의 행위가 적법하다고 믿을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재판부는 A씨가 이미 법원으로부터 ‘유치권 존재 확인’ 화해권고결정을 받아둔 상태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항소심은 “플래카드 등 다른 가역적이고 덜 침해적인 방법으로도 유치권 행사 사실을 표시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락카 도색을 선택했다”고 판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