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을 앞둔 환자가 병상에서 말로 남긴 유언이라도 민법상 구수증서 유언 요건을 갖췄다면 효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유언자가 일부 말을 할 수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녹음 등 다른 방식의 유언이 가능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는 수증자 A씨가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사건은 A씨의 배다른 가족인 B씨가 사망 직전 병상에서 남긴 유언에서 비롯됐다. B씨는 증인 2명과 A씨가 있는 자리에서 예금채권 3건과 주거지 전세보증금 반환채권 등 자신의 재산 전부를 A씨에게 증여한다는 취지로 유언했다.
당시 증인 중 1명은 B씨의 말을 받아 적은 뒤 이를 낭독했다. 변호사였던 다른 증인은 유언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다만 B씨는 당시 호흡이 어려운 상태였고 발음도 분명하지 않았다.
계좌번호 등 일부 내용은 어렵게 말했으며 일부 재산의 구체적 내용은 제3자의 도움을 받아 표현한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유언을 남긴 지 사흘 만에 숨졌다. A씨는 이후 서울가정법원에 유언 검인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인용했다. B씨의 상속인들도 유언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민법상 유언 방식은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등 5가지다. 이 가운데 구수증서 유언은 질병이나 그 밖의 급박한 사유로 다른 방식의 유언을 할 수 없는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구수증서 유언이 유효하려면 증인 2명 이상이 참여해야 한다. 유언자는 그중 1명에게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이를 들은 사람이 필기한 뒤 낭독해야 한다.
이후 유언자와 증인이 그 내용이 정확하다고 승인하고 각자 서명하거나 기명날인해야 한다. 또 증인 또는 이해관계인은 급박한 사유가 종료된 날부터 7일 안에 법원에 검인을 신청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는 B씨가 남긴 유언을 녹음 유언으로 볼 수 있는지와 별도로, 구수증서 유언의 요건을 갖췄는지가 문제 됐다.
민법 제1067조는 녹음에 의한 유언의 경우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와 성명, 연월일을 말하고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자신의 성명을 말하도록 정하고 있다.
1심과 2심은 B씨의 유언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B씨가 당시 자신의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일정 부분 말도 할 수 있었던 만큼 녹음 방식의 유언이 불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원심은 이 사건 영상이 민법상 녹음 유언의 요건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면서도, B씨가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상 구수증서 유언을 예외적으로 인정할 사정도 부족하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B씨의 건강 상태와 유언 당시 상황을 종합하면 민법이 정한 다른 방식의 유언을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유언의 요식성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며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요건을 판단할 때도 이러한 취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유언자가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등을 인지하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해서 곧바로 구수증서 외의 방식으로 유언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B씨의 건강 상태와 유언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망인은 말기 폐암으로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고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말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 재산의 구체적 내용은 제3자의 도움을 받아 표현된 사정도 있다”며 “유언 직후 며칠 만에 사망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구수증서 외의 방식으로 유언할 수 있었다고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구수증서 유언 과정에서 녹화 등 보조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짚었다.
대법원은 “유언자의 의사와 절차를 확인하기 위해 유언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는 것은 가능하다”면서도 “영상에 유언자가 일부 말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는 사정만으로 녹음 유언의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또 “이 사건 영상만으로 민법상 녹음 유언의 요건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는 원심의 판단은 수긍할 수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하여 곧바로 구수증서 유언의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언 과정에 증인들이 참여했고 상속인들도 유언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원심은 망인이 일부 말을 할 수 있었다는 사정만을 들어 구수증서 유언의 보충성 요건을 지나치게 좁게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