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의 승자가 날카롭고 공격적인 존재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살아남은 것은 타인과 연결되고 협력할 수 있는 존재였다. 경쟁보다 협력, 공격보다 관계 형성이 생존의 중요한 조건이었다는 설명이다.
이 관점은 법률 현장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법정과 수사 절차는 냉정한 기록과 증거의 세계다. 판단은 감정이 아니라 사실과 법리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과 법리에 접근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피의자, 피고인, 피해자, 증인, 가족, 수사기관, 재판부 모두가 각자의 언어와 기억, 두려움 속에서 사건을 마주한다.
변호인의 역할도 결국 사람의 말을 듣는 일에서 출발한다.
기록을 읽고 법리를 검토하며 판례를 찾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필요한 과정이 있다. 사건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꺼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당사자가 변호인을 신뢰하지 못하면 필요한 말만 한다. 유리해 보이는 말은 남기고 불리한 말은 감춘다. 창피한 이야기는 빼고, 본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부분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는 바로 그 빠진 말 속에 중요한 단서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록에는 결과가 남는다. 하지만 사건은 결과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관계, 동기, 오해, 진술이 어긋난 이유, 피해 회복이 지연된 사정, 사건 이후 달라진 생활 등은 기록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 공백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사건 당사자 자신이다.
특히 항소심 상담 과정에서는 1심 기록에 없던 이야기가 뒤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왜 앞선 단계에서 말하지 않았는지 물으면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야기해도 되는지 몰랐다”, “사건과 관련 있는지 몰랐다”, “괜히 말했다가 오히려 나쁘게 보일 것 같았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말이 항소심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한다. 1심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던 범행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조사 당시 진술이 달라진 이유, 합의가 어려웠던 사정, 사건 이후의 변화 등이 뒤늦게 드러나면 사건을 바라보는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말이 곧바로 법정의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려내고, 기록과 증거에 비춰 검토하며,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 법정에 제출하는 것은 변호인의 몫이다. 그래서 변호인은 당사자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리된 말을 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말, 당사자 본인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말 속에서 사건을 다시 볼 실마리가 나올 때가 있다. 상담과 접견이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방어권 보장의 중요한 과정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다정함이 무조건적인 공감이나 위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형사사건에서 변호인은 불리한 부분을 불리하다고 말해야 한다.
인정해야 할 사실은 인정해야 하고, 다투기 어려운 부분을 무리하게 부인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듣고 싶은 말만 반복하는 것은 책임 있는 조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어떤 태도로 전달하느냐다. 사람은 공격받는다고 느끼면 입을 닫는다. 반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조금씩 사실을 말하기 시작한다. 변호인이 당사자를 대할 때 필요한 태도는 추궁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정을 이해하고 끝까지 듣는 것이다.
이 과정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말만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건의 전체 모습을 정확히 보기 위한 절차다. 무엇을 인정하고 무엇을 다툴지, 어떤 사정을 설명하고 어떤 주장은 정리해야 할지, 어느 부분을 먼저 말해야 재판부가 사건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지는 충분한 대화 없이는 정하기 어렵다.
법정에서의 설득도 마찬가지다. 법리와 증거, 기록과 서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법리와 증거를 어떤 순서로 제시할지, 어느 부분을 먼저 인정하고 어느 부분을 다툴지, 당사자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강한 어조가 항상 좋은 변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다고 좋은 방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인정할 부분을 먼저 인정해야 다툴 부분이 분명해진다. 불리해 보이는 사정까지 함께 설명해야 재판부가 사건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좋은 변론은 변호인 혼자 만드는 결과물이 아니다. 당사자가 마음을 열고, 변호인이 그 말을 기록과 법리의 기준으로 점검하며, 다시 법정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이 제대로 작동할 때 방어권도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는 사건 당사자의 말을 충분히 듣는 일을 감정노동으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형사절차에서 그것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기본 조건에 가깝다.
당사자가 말할 수 있어야 사실관계가 정리되고, 사실관계가 정리돼야 법적 판단도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다정함은 변론의 약점이 아니다.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태도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필요한 말을 끌어내며, 그 말을 법정에서 검증 가능한 언어로 바꾸는 일. 그 과정에서 다정함은 개인적 미덕을 넘어 방어권을 실질화하는 힘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