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서 복역해도 국내 재판 가능…형 집행은 반영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처벌이 현지에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범죄가 발생한 나라에서 이미 재판을 받고 복역했더라도 귀국 뒤 한국에서 다시 수사나 재판을 받을 수 있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해외 범죄의 국내 처벌 가능성은 범죄가 발생한 장소, 가해자와 피해자의 국적, 침해된 법익, 외국 판결의 집행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 형법은 국내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 내국인과 외국인을 모두 처벌하는 속지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동시에 한국인이 대한민국 영역 밖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한국 형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내국인 국외범 규정을 두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인이 해외에서 마약, 사기, 살인, 성범죄, 폭행 등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가 발생한 나라에서 먼저 처벌받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귀국 뒤 국내 형사절차가 다시 진행될 가능성도 남는다.
범죄 장소가 외국이면 현지 수사기관과 법원이 우선 관할권을 행사하지만,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면 한국 형법상 처벌 대상에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이미 처벌받았다는 사정만으로 한국의 형사절차가 막히는 것은 아니다. 외국 법원의 확정판결은 원칙적으로 한국 법원을 그대로 구속하지 않고, 외국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국내에서 일사부재리 효력이 곧바로 인정되는 구조도 아니다.
다만 외국에서 실제로 형이 집행된 경우에는 국내 재판에서 그 사정이 반영된다.
외국에서 형의 전부 또는 일부가 집행된 사람에 대해 그 집행된 형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국내에서 선고하는 형에 산입하도록 정하고 있다.
외국에서 복역한 기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국내에서 다시 형을 집행하는 불이익을 줄이기 위한 장치다.
예컨대 한국인이 해외에서 마약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일정 기간 복역한 뒤 귀국해 같은 범죄사실로 국내 재판을 받는 경우, 법원은 외국에서 실제 집행된 형을 국내 선고형에 반영하게 된다.
다만 외국에서 체포돼 조사받았거나 미결구금 상태에 있었던 사정이 곧바로 ‘외국에서 집행된 형’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사건별 판단이 필요하다.
페스카마호 사건이 보여준 국외범 처벌
피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도 처벌 가능성이 달라진다. 가해자가 한국인이라면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와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내국인 국외범 규정에 따라 국내 처벌 가능성이 있다.
해외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뿐 아니라 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한국 형법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가해자가 외국인이고 범죄 장소도 외국이라면 한국 형법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는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익이 직접 침해됐는지, 형법상 외국인의 국외범 처벌 규정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 남태평양 사모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이다.
당시 중국 국적 조선족 선원들은 온두라스 선적 원양어선에서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등 11명을 살해했다. 범행 장소는 대한민국 영토가 아니었고 선박도 한국 선박이 아니었으며, 가해자들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은 한국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됐다. 피해자 중 다수가 한국인이었고, 외국인이 대한민국 영역 밖에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 한국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근거가 됐다.
1심은 범행에 가담한 조선족 선원 6명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전재천 씨를 제외한 5명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전 씨의 사형과 나머지 5명의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페스카마호 사건은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피해자가 된 경우 한국 형사사법 절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내국인 국외범 규정이 문제 되고, 외국인이 해외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외국인의 국외범 규정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베트남 사형수 4명…중국선 2023년 사형 집행
다만 해외 범죄가 모두 국내 재판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자유형을 선고받은 한국인이 국내로 이송돼 남은 형을 한국 교정시설에서 집행받는 경우에는 절차가 달라질 수 있다.
국제수형자이송 제도는 외국에서 징역형이나 금고형을 선고받은 자국민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본국으로 돌아와 형을 계속 집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 경우 외국에서 선고된 자유형을 국내에서 집행 중이거나 집행을 마친 때에는 같은 범죄사실로 다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 적용될 수 있다.
외국 판결을 한국에서 어떻게 집행했는지에 따라 국내 재판 가능성도 달라지는 셈이다.
실제로 해외에 수감 중인 한국인도 적지 않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김상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외교부에서 받은 ‘해외 우리 국민 수감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해외에 수감 중인 한국인은 52개국 1163명으로 집계됐다.
국가별로는 중국이 360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체 해외 수감자의 31% 수준이다. 일본은 264명으로 23%를 차지했고, 이어 베트남 162명, 미국 130명, 필리핀 41명, 태국 40명, 캄보디아 38명, 호주 17명, 라오스 13명 순이었다.
죄명별로는 마약 범죄가 262명으로 가장 많았다. 전체 해외 수감자의 23%에 해당한다. 국가별 마약사범은 일본 67명, 베트남 50명, 중국 49명, 태국 20명, 캄보디아 15명, 필리핀 14명, 라오스 10명으로 나타났다.
마약 다음으로는 사기 등 혐의 수감자가 258명으로 많았다. 이어 살인 131명, 절도 81명, 도박 64명, 강간·추행 48명, 폭행·상해 45명, 강도 37명, 출입국 관련 범죄 37명, 성매매 29명, 납치·감금 22명, 교통사고 19명, 밀수 17명 순이었다.
해외 수감자 가운데 장기 복역자와 사형수도 포함됐다.
최장기 수감자는 필리핀에서 강간 혐의로 1998년부터 28년째 복역 중인 한국인으로 파악됐다. 해외에 수감된 한국인 사형수는 4명으로, 모두 베트남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은 마약 범죄와 살인 등 일부 중대 범죄에 대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2023년 8월 필로폰 5㎏을 판매 목적으로 소지한 혐의로 체포된 한국인 남성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바 있다. 외교부는 2023년 이후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형 집행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는 단순히 ‘외국에서 끝나는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범죄지 국가는 자국 법에 따라 처벌권을 행사하고, 한국은 내국인의 국외범 또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국외범 규정에 따라 별도의 형사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법무법인 안팍 안지성 변호사는 “마약, 사기, 성범죄, 폭력범죄처럼 국내 형법상 처벌 대상이 분명한 범죄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와 관계없이 국내 처벌 가능성이 남는다”며 “해외 체류 중 벌어진 범죄라도 귀국 뒤 다시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해외 범죄는 현지 법과 한국 법이 함께 작동하는 영역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