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에서 불과 1㎞ 남쪽에 있던 개성소년형무소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과 함께 총성이 울렸고, 교도관들은 군부대와 관공서를 향하던 공격이 수용자 탈출로 도시 질서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형무소까지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질서이고, 교정시설은 그 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야 하는 마지막 경계선에 가까웠다.
통신이 끊기고 상부 지시가 닿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도관들은 형무소 열쇠를 내려놓지 않았다. 가족을 피란시키지 못한 채 정문을 지켰고, 수용자를 통제하고 형무소를 방어하는 전투요원이 됐다.
6일 호국보훈의 달마다 군인과 경찰, 소방공무원의 희생은 자주 언급되지만, 전쟁과 재난, 시설 내부의 위험 속에서 국가 질서를 지켜온 교정공무원의 희생은 여전히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6·25전쟁 당시 전국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던 교도관들이 수용자 관리와 시설 방어, 피란 지휘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하거나 불법 처형 등으로 순직했다는 사실은 오랜 기간 교정 조직 안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던 교도관 167명이 전사하거나 불법 처형 등으로 순직했다. 이들은 수용자 관리와 시설 방어, 피란 지휘 임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었다.
소년수 1500명 지키며 북한군과 맞선 교도관들
전쟁 이전부터 형무소는 이미 과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순사건 이후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좌익 사범이 급증하면서 전국 형무소에는 정원의 두세 배에 이르는 수용자가 들어찼고, 질병과 영양실조까지 겹친 공간에 전쟁이 덮치면서 교도관들은 피란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수용자 통제와 생명 보호라는 이중의 책임을 떠안았다.
1923년 경성형무소 개성분감에서 출발한 개성소년형무소는 18세 미만 남자 소년수 등을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광복 이후 개성이 38선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교정시설로 남았고, 형무소는 38선에서 불과 1㎞ 떨어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하자 개성소년형무소는 곧바로 포위됐다.
당시 우학종 소장은 전 직원을 비상소집했지만, 직원들이 모두 도착하기도 전에 형무소는 전장 한가운데 놓였다. 우 소장은 응소한 교도관 30여명과 함께 소총 등 열악한 무기로 형무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당시 형무소에는 소년 수형자 1500명가량이 수용돼 있었다. 교도관들은 수용자 탈출을 막는 동시에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개성 시내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직원 가족이 인질로 잡혀 협박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교도관들은 시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우 소장은 직원들을 모아 “우리는 형무소 사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훗날 책임 추궁이 있거든 모두 소장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라”는 말을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무소는 약 10시간의 사투 끝에 함락됐고, 남은 교도관들은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우 소장의 희생을 기리는 흉상은 1989년 서울구치소 내부에 세워졌지만, 6·25 전쟁 속 교정공무원들의 희생은 군경 전사자에 비해 오랫동안 사회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전쟁 속 교도관의 임무는 단순한 감시가 아니었다.
수용자가 집단으로 탈출하면 피란민 대열은 무너질 수 있었다. 좌익 사범과 일반 수형자가 뒤섞인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근 도시는 곧바로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교도관들은 총을 든 군인도, 전선을 지키는 병사도 아니었지만, 전쟁 초기에 국가 질서를 붙든 또 다른 전투요원이었다.
춘천형무소와 청주형무소 등 다른 지역 교도관들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소장은 재소자 이동을 결단했고, 교도관들은 수백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수용자를 이끌고 피란길에 올랐으며 포탄이 떨어지는 길에서 직원과 재소자, 피란민이 함께 뛰었다. 일부 교도관은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직장을 따라 남하했다.
교도관들이 마주한 선택은 잔혹했다.
수용자를 그대로 두면 북한군에게 넘어가거나 집단 탈출로 이어질 수 있었고 무리하게 이동하면 도주와 폭동, 피란민 피해를 막기 어려웠다.
수용자를 살리고, 시민을 지키고, 시설을 방어해야 하는 책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 때문에 6·25 전쟁기의 교정공무원 희생은 단순한 순직이 아니라 전시 국가 기능을 지킨 희생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제대로 불리지 못했고, 6·25 전쟁 교정직 전몰자 규모 역시 뒤늦게 정리됐다.
2023년 법무부가 충혼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순직 교정공무원도 있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6·25전쟁 당시 167명의 우리 선배 교정 공직자들께서 교정 시설을 지키다 전사, 불법 처형 등으로 순직하셨다”고 밝혔다.
전쟁 뒤에도 끝나지 않은 교정 현장의 위험
교도관의 희생은 전쟁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정시설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일은 지금도 위험을 동반한다. 2004년 7월 12일 대전교도소에서 발생한 김동민 교도관 순직 사건은 교정 현장의 위험을 보여줬다.
당시 수형자 김원식은 1997년 상해치사 등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독방에서 생활하던 김원식은 교도관 면담을 반복해 요구했고 김동민 교도관이 이를 받아들여 면담하려는 순간, 김원식은 둔기로 김 교도관을 공격했다. 김 교도관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고 사흘 뒤 숨졌다.
김동민 교도관 영결식에서 대전교도소 교도관 일동이 발표한 성명은 지금도 교정 현장의 아픈 장면으로 남아 있다.
성명은 “인권운동가들이 미사여구로 인권을 자랑할 때 교도관은 수형자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있다”며 “수용자 인권을 보호한다며 그릇된 인권 정책이 만들어질 때마다 선량한 민중의 피가 범죄자 칼에 쓰러져간다”고 말했다.
현충일은 전쟁터에서 쓰러진 이들만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국가가 무너지지 않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버틴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다.
6·25의 형무소를 지킨 교도관들, 그리고 평시 교정시설 안에서 순직한 교도관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은 교정공무원을 위한 의례에 그치지 않고, 국가가 질서를 누구에게 맡겨왔으며 그 책임에 어떤 예우로 답해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다.
법무부 교정본부 관계자는 “6·25전쟁 당시 교정시설을 지키다 순직한 교정공무원들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라며 “교정시설 안에서 수용 질서를 유지하고, 각종 위험 상황에 대응하며,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책임을 다해 온 교정공무원들의 희생과 헌신이 잊히지 않도록 국민들께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