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탁보다 합의…‘합의전담팀’ 뜬다, 달라진 형사변호 시장

7월부터 양형기준 ‘공탁 포함’ 삭제…피해자 의사 중요해져
보이스피싱·리딩방 등 다수 피해 사건에 합의전담 인력 투입
“서면만 잘 써서는 안 돼”…하루 종일 피해자 설득하는 변호사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피고인이 선택해 온 ‘형사공탁’의 양형상 비중이 줄어들면서 형사사건을 맡는 로펌들의 업무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피해자가 여러 명인 보이스피싱이나 투자리딩방 사기 사건을 중심으로 합의 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을 두는 로펌까지 등장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피해회복과 관련한 양형기준을 개정하면서 전체 범죄군에 규정돼 있던 ‘실질적 피해회복(공탁 포함)’, ‘상당한 피해회복(공탁 포함)’에서 ‘공탁 포함’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새 기준은 지난 7월 1일 이후 공소가 제기된 사건부터 적용되고 있다.

 

현재 공탁 자체가 양형에서 고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해자가 공탁금 수령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경우에는 합의와 같은 수준의 피해회복으로 평가받기 어려워졌고, 사건 경위와 공탁액,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종합해 양형 사정으로 참작하게 된다.


공탁보다 ‘실제 합의’…로펌 업무도 달라졌다


이 같은 변화는 형사사건을 맡는 로펌들의 업무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는 변호인이 의견서와 변론요지서 등 양형자료를 제출하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일정 금액을 공탁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준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피해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실제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변호사와 사무직원이 합의 업무에 투입하는 시간도 크게 늘었다.

 

서초동의 한 법무법인은 피해자 합의를 담당하는 별도 인력을 두고 있다.

 

피해자가 여러 명인 사기 사건을 맡으면 변호사의 법리 검토와 법정 대응과는 별도로 피해자들과 연락해 합의 의사와 요구 금액을 확인하고, 의뢰인이 마련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합의 조건을 조율한다.

 

한 형사전문변호사는 “이제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서면만 잘 작성한다고 사건이 끝나는 구조가 아니다”며 “의뢰인이 마련할 수 있는 합의금은 한정돼 있는데 피해금액이나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금액은 훨씬 큰 사건이 많아 변호사와 직원들이 합의 과정에 상당한 시간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수임료를 받고 재판 대응을 잘하는 것이 변호인의 주요 업무였다면 지금은 의뢰인이 마련한 돈으로 실제 피해회복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지도 중요해졌다”고 했다.

 

합의 업무가 사실상 하나의 별도 업무 영역으로 자리 잡으면서 내부 운영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일부 로펌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성사시킨 직원에게 별도의 인센티브도 지급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신 보이스피싱 아니냐”…합의 전화 신고까지


피해자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한 법무법인 직원은 보이스피싱 사건 피해자에게 합의를 제안하기 위해 연락했다가 오히려 보이스피싱 의심 신고를 당했다.

 

피해자가 갑작스럽게 돈 이야기를 꺼내는 전화를 수상하게 여겨 해당 번호를 신고하면서 직원의 휴대전화 번호가 보이스피싱 의심 번호로 등록됐고, 이를 해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보이스피싱이나 투자리딩방 사기처럼 피해자가 수십 명에 이르는 사건은 합의 업무가 더욱 복잡하다.

 

피해자별 피해금액과 합의 의사가 제각각인 데다 일부 피해자는 피고인 측과의 연락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최근 합의전담팀을 꾸린 한 로펌 관계자는 “피해자가 많은 사건은 직원들이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며 “피해자마다 처한 상황과 요구가 달라 일률적인 금액을 제시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성범죄 사건에서도 피해자 측과 합의를 조율하기 위한 변호인의 업무가 늘고 있다.

 

서초동의 또 다른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은 피고인 측이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만큼 피해자 국선변호사나 대리인을 통해 합의 의사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건에 따라서는 피해자 측 변호사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합의를 요청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적극적 합의 시도, 자칫 ‘2차 가해’ 될 수도


다만 합의를 위한 접촉이 무조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현행 양형기준은 합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거나 합의 거절에 따른 불이익을 암시하는 등 부당한 압력을 가한 경우 이를 불리한 양형요소로 평가하고 있다.

 

피해자가 접촉을 명확히 거부한 뒤에도 반복적으로 연락하거나, 피해자 측 변호인이 선임돼 있는데도 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접촉할 경우 오히려 피고인에게 불리한 사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성범죄나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사건에서는 피해자 보호 문제가 더욱 민감하다.

 

형사공탁 특례제도가 도입된 배경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다.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피고인에게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공탁할 수 있도록 해 합의를 명목으로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알아내거나 원치 않는 접촉을 반복하는 문제를 줄이려는 취지다.

 

법조계에서는 공탁의 양형상 비중을 낮추고 피해자의 의사를 보다 중시하는 방향에는 공감하면서도, 합의가 성립하지 않은 사건에서 피고인의 실질적인 피해회복 노력까지 지나치게 낮게 평가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로펌 관계자는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거나 연락 자체를 거부하는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있어도 실제 합의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재산범죄 등에서는 합의 성립 여부와 별개로 피고인이 실제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