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피해자가 피고인과 합의했는데 부모가 뒤늦게 엄벌 탄원서를 냈다면 누구의 의사를 따라야 할까.”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피해자가 한 해 5000명을 넘어선 가운데, 미성년 피해자 본인의 처벌불원 의사와 법정대리인의 엄벌 요구가 엇갈리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28일 성평등가족부의 ‘2025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발생 추세 및 동향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4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돼 가해자의 신상정보가 등록되고 판결문이 확보된 사건의 피해자는 5072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4661명보다 411명(8.8%) 증가한 수치다.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처벌불원 의사를 받은 사실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 사정으로 고려될 수 있다.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에는 피고인 측이 부모 등 법정대리인을 상대로 합의를 시도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법정대리인이 합의를 거부한 상황에서 피해자 본인이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거나, 피해자와 합의한 뒤 법정대리인이 이에 반대하며 엄벌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최근 청주지법에서 미성년 피해자 본인의 처벌불원 의사와 법정대리인인 부모가 엄벌탄원서를 제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피해 아동과의 만남을 유도한 뒤 성적 학대행위를 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범행 경위와 피해자의 나이, 범행 횟수 등을 고려해 A씨에게 징역 4년 등을 선고했다. A씨는 형이 지나치게 무거워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항소심이 진행되던 중 A씨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를 통해 피해자 본인과 합의했다. 피해자는 국선변호사로부터 합의의 법률적 의미와 효과에 관한 설명을 들은 뒤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의 법정대리인은 “동의한적이 없다“며 A씨를 엄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A씨 측은 피해자가 성년에 가까운 나이이고 국선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합의의 의미와 효과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한 만큼 이를 양형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 “의사능력 있다면 부모 동의 없어도 가능”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의사능력이 있다면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도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청소년에게 의사능력이 있는 이상 단독으로 피고인이나 피의자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거나 기존의 처벌희망 의사를 철회할 수 있다”며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피해자가 현재 18세로 성년에 가까운 데다 국선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합의의 법률적 의미와 효과에 관한 설명을 들은 뒤 합의한 점도 근거로 들었다.
법정대리인이 엄벌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사정만으로 피해자 본인의 처벌불원 의사표시가 효력을 잃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와의 합의를 원심판결 이후 새롭게 발생한 양형 사정으로 받아들였다.
대법원도 피해 청소년에게 의사능력이 있다면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거나 기존의 처벌희망 의사를 철회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대법원은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반드시 요구하면 명문의 근거 없이 법정대리인에게 처벌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새롭게 부여하는 결과가 된다”고 봤다.
다만 피해자의 나이만으로 의사능력이 당연히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나이와 지능, 지적 수준, 발달·성숙도, 사회적응력 등을 종합해 범죄와 피해 상황, 처벌불원 의사표시가 가져올 결과를 이해할 수 있는지 세밀하고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단이다.
강요나 회유 없이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 작성됐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합의해도 처벌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냐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는 공소를 기각하는 사유가 아니라 형량을 정할 때 고려하는 자료로 작용한다.
아동복지법상 성적 학대행위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더라도 수사와 재판을 계속할 수 있는 범죄다.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사정만으로 범죄가 성립하지 않거나 피고인을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아동학대범죄 양형기준은 ‘처벌불원 또는 실질적 피해 회복’을 감경요소로 두고 있다.
처벌불원은 피고인이 범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피해자가 합의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피고인 측의 강요나 기망으로 작성된 합의서는 감경요소로 인정되지 않는다.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의 처벌불원 의사에 통상적으로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피해자의 나이와 지적 수준 등을 토대로 의사표시의 의미와 효과를 이해할 능력이 있었는지, 합의서에 자유롭고 진정한 의사가 담겼는지를 살핀다.
미성년 피해자가 합의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정대리인의 엄벌 탄원서가 양형자료에서 배제되는 것도 아니다.
탄원서의 내용과 합의 경위, 피해자의 현재 상태와 피해 회복 여부 등은 함께 심리될 수 있다.
법률사무소 김형민 변호사는 “피해자가 합의의 의미와 효과를 이해할 의사능력을 갖추고 국선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자유롭게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다면 부모가 뒤늦게 엄벌을 요구했다는 사정만으로 그 의사표시를 무효로 볼 수는 없다”며 “다만 법원은 합의 과정에 강요나 회유가 없었는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가 반영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 양형에 반영하게 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