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게시한 현수막의 문구를 임의로 수정해 본래의 전달 의미를 왜곡했다면 물리적인 파손이 없더라도 형법상 재물손괴죄가 성립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타인 소유의 현수막에 임의로 글자를 추가하거나 내용을 변경하는 행위는 경우에 따라 형법상 재물손괴죄로 처벌될 수 있다. 단순한 낙서 수준이 아니라 현수막의 본래 기능을 해치는지 여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실제 사건에서도 이 같은 쟁점이 문제됐다. 종중 회의에 참석하려던 A씨는 이미 임기가 만료된 전 종중회장이 현수막에 ‘회장’으로 표기된 것을 보고 이름 앞에 ‘전(前)’ 글자를 추가로 기재했다.
검찰은 이를 재물손괴로 보고 A씨를 기소했다. A씨는 현수막 내용이 사실과 달라 바로잡기 위한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부산지방법원은 현수막의 내용이 일부 사실과 다르더라도 임의로 수정하는 행위 자체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특히 외부에 게시된 현수막은 불특정 다수에게 특정 내용을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만큼 그 내용이 변경될 경우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형법은 타인의 재물을 손괴하거나 그 효용을 해한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효용을 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파손하는 것뿐 아니라 본래의 사용 목적에 제공할 수 없게 만드는 경우까지 포함된다.
법원은 현수막과 같은 게시물의 경우 물리적 훼손 여부보다 그 기능이 침해됐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글자를 추가해 의미를 바꾸거나, 게시자가 의도한 메시지 전달을 방해하는 경우에는 원상회복이 가능하더라도 재물손괴가 성립할 수 있다는 취지다.
또 “사실을 알리기 위한 행위였다”는 주장 역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법원은 이러한 경우에도 정정 요청이나 별도의 공지, 회의 발언 등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중요하게 본다. 즉 긴급하거나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임의 수정은 정당행위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판례에서도 현수막을 철거하거나 내용을 가리는 행위, 또는 문구를 변경해 게시 목적을 훼손한 경우 재물손괴를 인정한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현수막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를 직접 수정하는 방식은 형사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법률사무소 로유 배희정 변호사는 “표현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재물을 훼손하는 방식은 법적으로 허용되기 어렵다”며 “정식 절차를 통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