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 관련 사건을 보면 무엇이 진심인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정말 사랑이었는지, 일방적인 집착이었는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폭력이었는지, 아니면 관계의 해석이 엇갈린 것인지. 사건마다 실체와 정황은 모두 다르다. 같은 ‘강간’이라는 죄명이 붙어도 내용은 제각각이다. 물론 실제로 강압과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일부 사건에서는 관계의 실체와 동의 여부를 둘러싼 진실을 법정에서 치열하게 검증해야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의뢰인은 성형외과 의사였다. 고소 내용은 단순했다. “프로포폴을 놓고 강제로 범했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강간 및 강제추행 사건으로 입건된 상황이었다. 그의 설명은 달랐다. 병원에서 일하던 여성이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사귀자고 한 것도, 프로포폴을 놔 달라고 요구한 것도 상대방이었다는 것이다. 관계를 끊으려 하면 극단적인 표현을 하며 매달렸고, 자신도 그 관계를 사랑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절실했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의뢰인의 편이면서 동시에 가장 냉정한 질문자가 되어야 했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회의실을 나가면 저는 당신 편입니다. 하지
법정은 선고를 앞두고 유난히 조용해진다.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마지막으로 발언 기회를 묻는다. 이른바 ‘최후 진술’이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절차다. 최후 진술은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다. 판결을 선고하기 전 재판부가 피고인의 태도와 인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자리에서 피고인은 범행에 대한 입장과 반성의 정도 앞으로의 계획을 직접 설명할 수 있다. 법원은 단순한 감정 표현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본다. “죄송하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로 인해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야 한다. 피해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또 하나의 핵심은 재범 가능성이다. 형사재판에서 법원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다시 범죄가 반복되는지 여부다. 따라서 출소 이후의 생활 계획 치료 계획 직업 계획 가족과의 관계 회복 방안 등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막연한 다짐보다는 구체적인 실천 계획이 설득력을 가진다. 재판부에 대한 태도도 영향을 미친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반대로 책임을
1심 재판에서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 뒤 항소를 준비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적지 않은 고민에 놓이게 된다. 판결의 유·무죄 판단뿐 아니라 선고된 형량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항소심을 통해 결과를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항소심은 1심 재판의 단순한 반복 절차가 아니다. 심리 방식과 판단 구조가 상당 부분 달라지는 만큼, 1심과 동일한 대응을 이어갈 경우 기대했던 결과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 항소심의 성격을 이해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먼저 1심에서 무죄를 주장했음에도 유죄 판결이 선고된 경우라면 판결문과 증거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재판부가 어떤 증거를 근거로 사실관계를 인정했는지, 판단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이나 증거 평가의 오류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항소심에서 판단이 뒤집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가 제출되거나, 기존 증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만한 사정이 드러나야 하는 경우가 많다. 1심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사실관계나 간과된 자료가 발견될 경우 무죄 판단으로 변경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반면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정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일
겨울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어느 밤이었다. 늦은 시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됐다. 전화를 건 이는 노년의 여성이었고, 아들의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음주운전 재범 상태였다. 이미 두 차례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었고, 재판 과정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판사의 질책과 검사의 강한 구형까지 이어지면서 실형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건은 변호인 없이 진행된 채 선고기일만을 앞두고 있었다. 재판을 앞둔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반성문 제출이다.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사건 기록 속에도 어머니가 직접 작성해 제출한 반성문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반성문이 항상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거나 피고인을 두둔하는 내용이 강조될 경우,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인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확인하려는 것은 가족의 안타까움이 아니라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형사재판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피해 회복과 재범 방지를 위한 노력이다. 사건 이후 어
개업 초기 무렵, 대규모 투자 사기 사건이 사회적 관심 속에서 수사되던 시기가 있었다. 해외 투자로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투자자를 모집한 이른바 ‘폰지 구조’ 의심 사건으로, 피해 규모가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은 투자 설명회 현장을 급습했고, 현장에 있던 회사 관계자들이 현행범 체포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자가 다수였고 추가 피해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사건은 곧 대형 금융사기로 인식됐다. 구속영장 청구 가능성 역시 높게 거론되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사회적 파장이 큰 경제범죄 사건에서는 사실관계 자체를 다투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수사기관이 장기간 자료를 확보하고 범죄 구조를 분석한 이후라면, 변론의 초점은 범죄 성립 여부보다는 절차의 적법성과 강제처분의 필요성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당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체포의 방식이었다. 형사소송법상 현행범 체포는 범죄가 실행 중이거나 직후라는 점이 명백해야 하며, 요건 해석 역시 엄격하게 이루어진다. 단순히 범죄와 관련된 장소에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현행범 요건이 충족되는지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다. 특히 투자 설명회와 같은 행위가 곧바로 사기 범행의 실행 단계로 평가될 수 있는지 여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에 대한 최근의 판결 경향을 보면 대부분 유죄가 선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하면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실제로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 속아 현금수거책으로 이용된 것에 불과한데,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해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늘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억울하게 실형을 받지 않는 몇 가지 포인트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이 사기 범행의 방조범으로 처벌되기 위해서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사기 범행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미필적으로라도 인식하고, 이를 돕겠다는 의사가 있었음이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되어야 한다. 검사가 피고인의 고의를 적극 입증하지 못하면, 단순한 의심만으로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그래서 미필적 고의 부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미필적 고의의 부재 입증을 어떻게 하면 될까? 여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① 신분 및 개인정보 적극 제공 피고인이 구인 광고를 통해 일자리를 찾았고, 업체에 자신의 운전면허증, 주민등록등본, 이력서 등을 제공하며 자신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음을 보여줘야 한다. 일반적으로
2017년 8월 29일 자 뉴스에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렸다. <“네가 모셔라” 자식 다툼에 흉기 휘두른 90대 아버지>.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90대의 노인이 자신의 부양 문제를 놓고 다투는 딸들을 보고 격분해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이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로 노인(당시 95세)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인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그는 큰딸과 막내딸이 자신을 부양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이자, 막내딸의 뺨을 때리고 허리춤에 숨겨 둔 흉기로 싸움을 말리는 막냇사위의 목과 옆구리를 찌르고 말았다. 다행히 막냇사위는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살던 노인이 한국에 돌아오면서 부양 문제를 두고 딸들 간에 평소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노인이 막내딸 집에 머무는 동안 딸이 자신을 내보내려 한다고 생각해 막내딸과 사이가 좋지 않아졌고, “해코지를 당할까 봐 방어 차원에서 흉기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경찰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은 현장에 있던 가족 중 한 명의 신고로 현행범으로 체포,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결국 살인미수 혐의로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내가 27년
오전 7시,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전을 받았다. 아침부터 미지정 사동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미지정 사동을 담당할 때 데리고 있던 30대 후반의 J였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수용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던 J가 싸움을, 그것도 아버지뻘 되는 수용자 C와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있었고 C가 J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한마디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말에 J가 C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J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J가 아버지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가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C가 며칠 전에도 J에게 “너 보육원 출신이냐?”고 물어봐 기분이 나쁘던 차에 애비 없는 자식 소리까지 나오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J의 이름을 부르며 “너답지 않게 왜 그랬어?”라고 물어보자, 눈물을 왈칵 쏟는다. J가 사과를 하고 싶다 하고 C 역시 자식뻘 되는 놈 처벌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는 팀장의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J에
변호사 경력이 길지 않았던 때 담당했던 사건이었다. 한국인 남편과 조선족 아내 부부가 함께 구속되었다. 혐의는 보이스피싱. 두 사람을 처음 접견하던 날, 남편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본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변호사님, 보이스피싱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저희는 그냥 친구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았을 뿐이에요.” 아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오열을 할 뿐이었다. 아내가 환전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환전소에서 사용하던 통장으로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입금되었고, 입금된 돈을 중국의 다른 통장으로 이른바 ‘환치기’ 수법으로 보낸 정황이 포착되어 구속된 것으로 보였다. 겉보기에 부부의 사연은 영락없는 보이스피싱 범행이었다. 보이스피싱 범행의 특성은 점조직이라는 점에 있다. 계획을 세우는 사람, 피해자를 속이는 사람, 대포통장을 모집하는 사람, 그리고 피해금을 인출하거나 송금하는 사람까지 모두 각기 따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특히 인출책이나 송금책의 경우 구체적인 범행 방법을 잘 알지 못하고 본인이 정확히 어떤 일에 가담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형사 소송에서 범행의 고의는 엄격하게 인정하는 것이 원
사실 법, 특히 형법에서는 ‘진심’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고의’는 중요하다. 두 개념은 어떻게 다를까? 변호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 중 하나는 의뢰인들이 “왜 재판에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느냐"고 묻는 순간이이다. 사기 사건에서 법원 판단의 핵심은 “기망 행위를 했는가”이다. 많은 의뢰인들은 “피해를 줄 의도는 없었다”, “나도 사업이 성공할 줄 알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의뢰인들의 진심을 믿는다. 하지만 법원은 ‘진심’이 아닌 ‘고의’를 본다. 중요한 것은 그가 피해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행동했느냐이다. 그런데 고의란 무엇일까. 상대방에게 한 말이 실제와 다를 수도 있고, 계획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법은 내심으로 이를 인식하고 용인했다면 사기죄의 유죄를 선고한다. 변호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 보면, 사업을 하는 사람 중 실패를 목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투자자들, 즉 나중에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도 100% 성공을 확신하고 돈을 맡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정말 투자자들에게 100% 성공할 것이라 믿게 했던 것일까? 이 지점에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