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짧은 만남이었지. 난 그리움이 남아 펜을 들고, 아쉽게 표현할 수 없던 머릿속 단어들을 떠올리며 펜 끝을 편지지 여백에 두들기고만 있어. 항상 접견이 마친 후엔 당신에게 하지 못했던 수많은 말이 남는데, 그걸 편지로 옮겨 적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해 늘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펜으로 똑, 똑, 노크만 하게 되네. 해가 숨고 달이 얼굴을 비추는 내내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끝내 편지지에 적어 내린 첫 문장은 ‘미안해’ 한 마디…. 당신을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해서, 이기적인 사랑만 해서 미안해! 부족하지만 내가 이기적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그리움만 남고 빈칸은 가득한 편지를 쓰지 않았을 텐데…. 끝으로 미안하고,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해!
사랑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트럭에 충돌한 것처럼 내 마음에 교통사고를 냈다 뺑소니를 하려는 그녀를 붙잡아 책임을 물어 연인이라는 서로 만족스러운 합의를 했다 다음 해 결혼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났다 내 인생 최고의 교통사고는 그녀를 만난 것이다
보고 싶은 한 여사님께… 안녕하세요. 더 시사법률의 열렬한 구독자입니다. 항상 신문이 발행되는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문을 받으면 서너 번 정독하는 바람에 읽을 차례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죄송하기까지 합니다. 이제 제가 제일 마지막 순번으로 읽든지 해야겠습니다. 7월 4일 오전 경, 저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수사관분들 세 명에게 긴급체포를 당하여 현재 OO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1심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월 29일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을 거두신 채 하늘나라로 가신 저희 어머니, 한 여사의 발인을 끝낸 지 3일 뒤의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채 가시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물론 저의 죄로 인해 고통받으신 피해자분들도 계시기에 변명이나 핑계를 댈 생각은 없으며, 저는 이곳에서 반성과 참회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진작에 멈추어야 했을 범죄였는데 현실에 눈이 멀어 이곳까지 와 버렸네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요? 저희 한 여사님의 발인을 치르고 삼우제까지 마무리한 다음 날 체포되었으니 말이죠…. 한 여사는 한평생 교편을 잡아 오신 정직하
박상현 주임님께 저는 대구교도소에서 항소가 끝나 추가 건 재판을 앞둔 기결수형자입니다. 이제 1년 정도 되었고 아직 3년 정도의 기간이 남았습니다. 다각형이라(4형) 가석방을 많이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밖에서 저를 꿋꿋이 기다려주는 아내와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웃으며 이겨내려 합니다. 제가 없어도 살 수는 있겠지만 그 환경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잘 알기에, 출소할 때까지 자격증 등을 취득하며 사회에 복귀할 준비를 하고 또 성실히 수형 생활을 하여 최대한 신속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제 마음가짐이 변화한 이유에는 당연히 아내와 자녀의 존재가 있지만, 이곳 대구교도소 사회복귀과 박상현 주임님께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계십니다. 전국 모든 교정시설의 교도관님께서 다 훌륭하시겠지만, 지난 1년간 제가 만난 수백 명의 교도관님들 중에서 단연 넘버 원이십니다. 꼭 감사하단 말을 전해드리고 싶지만 불가능하여 이 자리를 빌려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박상현 주임님께선 그 어느 수용자라도 편파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늘 일관성 있게 대해주십니다. 짜증, 화, 귀찮은 티 한 번 안 내시고, 구수한 사투리로 늘 웃으며 수용자 편에 서서 대
사랑하는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지난 5월 어느 날, 언니와의 접견 때 일이었다. 언니가 내게 말했다. “엄마가 이상해. 이번 주 요양병원에 면회 갔더니 ‘그동안 고마웠다’ 하시는 거야… 이제 가시려나 봐. 그런 말씀 하신 적 없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스마트 접견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고, 6월 초에 드디어 엄마를 보게 되었다. 5년 만에 화면 너머 마주한 엄마는 콧줄을 끼고 있었고, 초점 없는 눈동자에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다. 엄마는 굽은 손을 힘없이 흔들며 “〇〇야 사랑해, 우리 둘째 딸 사랑해”라는 말만 10분 동안 되뇌었다. 결국 엄마는 6월 26일 하늘나라로 가셨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축복 중 하나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환갑을 바라보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 4남매를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신 아버지, 어머니의 몸을 아끼지 않으셨던 사랑. 그 사랑을 날마다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심경을 헤아려 드리지 못했던 내 행동에 대한 죄송함을 감출 수가 없다. 유난히 연약했던 엄마는 늘 집에 링거병을 두고 사셨다. 그래도 매
안녕하세요. 더 시사법률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애독자입니다.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품 36.5에 게재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게 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성매매 알선으로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19살 소년수 시절을 거쳐 이곳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수용자 ○○○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큰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까지 오게 된 저는 많이 방황했고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습니다. 그럴 때 제게 큰 용기를 주신 대구교도소 김용기 주임님께 감사 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사회에서부터 편도염을 달고 살았습니다. 편도염 합병증으로 심근염에 걸려 중환자실에도 있던 병력이 있어 교도소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주십니다. 하지만 병동과 병원을 수차례 오가며 진료를 받다 보니 출역하고 싶어도 실질적인 어려움을 느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5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렵게만 느껴지고 앞날이 막막할 때 제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김용기 주임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용기 주임님께서는 매일 제가 있는 곳에 들러 제 몸 상태를 물어봐 주셨고, 사랑하는 가족이 암에 걸려 슬퍼할 때 교회에 다니시는 주임님이 저도 기독교인이란 걸 아시고 성경 말씀집을 매일 뽑아
To. 내 동생 김똥에게 똥아, 잘 지내? 형이야. 난 여기서 까까라는 별명을 받아 잘 지내고 있다. 벌써 출역 나온 지 3개월이나 되었구나. 똥아, 형은 네가 나와 같은 길로 갈까 봐 걱정된다… 지금 넌 도박에 빠져 있지. 아빠는 몸이 아파 집에서 쉬는 날도 있고, 난 여기 담장 안에 있고, 언제쯤 우리 세 부자가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똥아, 너는 부디 나의 길을 따라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까까 형은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고, 26년 8월까지 아빠랑 잘 있어 줘라. 9월에 입대 잘하고, 거기서 아무 탈 없이 다치지 말고 지내라. 보고 싶다. 김똥, 까까, 김 기사 우리 세 부자 파이팅! 더 시사법률 관계자님께 안녕하세요. 무더위 속에 고생 많으십니다. 전 더 시사법률 구독자이고, 지금도 꾸준히 잘 보고 있습니다. 이곳을 나가면 사회에서도 구독해서 보려 합니다. 다름 아니라 저희 아빠가 8월 6일, 제 생일날 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아빠가 평소 흡연을 많이 하셨는데, 병원에서 폐암 2기라고 하더라고요. 많이 속상하고 힘듭니다. 동생도 도박에 빠져있고요… 집에 돈이 없어서 아빠가 수술을 받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에게 전화는 하고 있지만,
초등학생 때 나는 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선택적 함묵증을 앓았다. 친구와 선생님의 말에 고갯짓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소통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연스럽게 ‘벙어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벙어리가 아니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내뱉을 수 없었다. 가시방석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면 더 가시 돋친 말이 오갔다. 부모님의 몸과 마음에는 멍과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아빠는 엄마가 한 말과 행동을 내게 폭로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을 했던 아빠는 가게를 닫은 채 하루 종일 집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욕설을 내뱉으며 소위 한바탕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 상황이라 내게도 멍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집에서도 벙어리 신세인 나 자신이 미워서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돈도 없거니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찾으러 온 아빠가 내 팔목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짧은 가출은 그렇게 끝났다. 밖에서 ‘예', ‘아니요’ 같은 간단한 의사 표현도 하지 못했던 나는 부모님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 내가 처음으
물결치며 흘러가는 바람아지나가는 길이라면 나의 호흡 한 줌 실어다가아이들 잠결 숨소리에 엄마 호흡 얹어 주어엄마의 숨소리 잠시나마 맡게 해주련 고요히 차가운 공기에 실려 날아가는 바람아지나가는 길이라면 나의 눈물 한 움큼 받아다가노부모 주름진 얼굴에 펴 주어70평생의 마지막 그리움의 딸이 되어죄송하다 전해주련 하얀 공기의 감촉이 너와 만나 실려갈 때에바람아... 그때의 나에게로 가 줄 수 있으련한없이 밝았고 맑았고 미소 가득했던그 젊음의 시간으로 가서후회하는 삶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주련 만질 수 없는 바람아너에게 실려 멀리 멀리 흩날리며날아가고 싶구나 소리 내어 울고 있는 후회의 시간들에게바람 흘려 달래 보고 싶구나 바람에 실려 떠나보낸 나의 뜨거운 마음을나의 그리운 이들은 받았을까…
엄마가 지병인 당뇨병과 백내장에 더해 불면증, 불안장애를 얻었다. 혼자 사는 엄마가 걱정돼 한 달에 한 번 고향 집에 내려가 엄마를 돌봐 왔었다. 고향 집에 갈 때는 편하게 입을 티셔츠와 바지, 속옷과 양말, 스킨, 로션을 배낭에 담아 간다. 여름옷은 괜찮지만 가을옷과 겨울옷은 부피가 크고 무거워 힘들다. 아예 짐을 놓고 다닐까 싶어 엄마에게 “작은 서랍장 하나 살까?”라고 물었지만 사지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거 몇 개나 된다고 그래? 들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 아니면 네 아버지가 쓰던 거 써도 되고” “힘들단 말이야” 아차! 일흔을 코앞에 둔 엄마 앞에서 힘들다는 푸념은 백전백패이건만. 엄마는 새치가 하나둘 나기 시작하는 아들의 머리카락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작은 방 장롱 맨 아래 칸 비워 둘 테니까 거기다 넣어” 내 물건을 넣어 둘 공간이 생기면서 나는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내려갔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뒤엔 기모 바지와 수면 잠옷, 수면 양말, 패딩 조끼까지 챙겼다. 장롱은 내 물건으로 금세 가득 찼다. “한 칸만 더 줘. 이걸로는 모자라” 나는 엄마의 장롱 한 칸을 더 분양받으려고 졸랐다. 30대 중반이 되었어도 엄마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