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소멸시효 지난 빚 일부 갚아도 시효이익 포기 추정 못 해”

대법, 20년 만에 판례 변경…
시효완성 후 변제, 이익 포기 아냐

채무자가 채권 소멸시효가 지난 뒤 빚을 일부 갚았다 해도 민법상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획일적으로 추정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24일 어업인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배당이의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시효이익의 포기’란,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지나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되는 빚에 대해 “그래도 나는 갚겠다”고 스스로 유리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소멸시효는 일정 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사라지는 제도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돈을 받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 돈을 받을 권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랜 기간 유지된 현실 상태를 인정해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채무자가 원하면 시효가 지난 뒤에도 그 이익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있다.

 

A씨는 과거 B씨에게 2억4천만 원을 빌렸고, 그중 일부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지난 뒤에도 1,800만 원을 변제했다. 이후 A씨는 자신의 부동산 경매 과정에서 B씨가 4억6천만 원을 배당받게 되자 “소멸시효가 지난 이자채권은 인정할 수 없다”며 배당표 정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쟁점은 A씨가 시효가 지난 채무를 일부 갚았다는 이유만으로, 시효이익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2심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따라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채무를 일부 갚은 경우,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날 기존 판례를 변경하며 “채무자가 단순히 채무 일부를 갚았다고 해서 시효이익을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 8명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여러 정황을 종합해 판단해야 하며, 시효이익을 포기하려면 명확한 의사표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채무자가 법적으로 유리한 시효완성 이익을 자진해서 포기하는 건 이례적이며, 이를 당연한 전제로 법리를 적용하는 것은 경험칙에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다만 일부 대법관은 “기존 법리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채무자가 반증을 통해 번복할 수 있으므로 유지해도 무방하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번 판결은 2000년 이후 20년 넘게 유지되어 온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으로, 법원은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온 심리구조를 바로잡고, 사안별 구체적 타당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