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채권 소멸시효가 지난 뒤 빚을 일부 갚았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민법상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획일적으로 추정할 수는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지난 24일 어업인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배당이의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시효이익의 포기’란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완성돼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되는 채무에 대해 스스로 그 이익을 포기하고 변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소멸시효는 일정 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해당 권리가 소멸하는 제도다. 예컨대 채권자가 오랫동안 채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그 돈을 받을 권리 자체가 사라진다.
이 제도는 장기간 형성된 사실관계를 존중해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다만 채무자가 원할 경우 시효 완성 이후에도 그 이익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A씨는 과거 B씨에게 2억4000만원을 빌렸고, 이 가운데 일부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이후에도 1800만원을 변제했다.
이후 A씨는 자신의 부동산 경매 절차에서 B씨가 4억6000만원을 배당받게 되자 “소멸시효가 지난 이자채권은 인정할 수 없다”며 배당표 정정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A씨가 시효가 완성된 채무를 일부 변제했다는 사정만으로 시효이익을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2심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채무를 일부 변제한 경우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날 기존 판례를 변경하며 “채무자가 단순히 채무 일부를 변제했다는 사정만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 8명은 “채무자가 시효 완성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여부는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하며 시효이익을 포기하려면 명확한 의사표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채무자가 법적으로 유리한 시효 완성의 이익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이를 당연한 전제로 법리를 적용하는 것은 경험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다만 일부 대법관은 “기존 법리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고 채무자가 반증을 통해 이를 번복할 수 있으므로 유지해도 무방하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번 판결은 2000년 이후 20년 넘게 유지돼 온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으로 법원은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온 기존의 심리 구조를 바로잡고 사안별 구체적 타당성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청 곽준호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채무자가 시효가 완성된 채무를 일부 변제했다는 사정만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한 것”이라며 “시효이익 포기는 채무자에게 불리한 효과를 가져오는 만큼 보다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변제 경위와 채무자의 인식, 의사표시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해 관련 분쟁에서 법원의 판단 기준이 한층 정교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