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부산 민락동 언덕 위 ‘학산별장’ 정원에는 장미가 가득했고, 독일산 셰퍼드 5마리가 집을 지켰다. 마을과는 단절된 채 오직 “수도검침원만 드나든다”는 소문만 돌았다. 그 집 주인은 훗날 히로뽕 밀조 조직 두목으로 신문 지면을 장식한 이황순이었다.
충북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공부에 뜻이 없어 중퇴한 이황순이 선택한 곳은 부산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폭력조직 '칠성파'에 가입한다. 당시 부산은 부산 지하세계가 밀수로 호황을 누릴 때였다. 부산은 대마도와 가깝고 일본산 물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국제시장 중심으로 밀수 거래가 활발했다.
이황순은 소형 밀수선이 아닌 합법 무역선을 이용한 대형 밀수에 나섰다. 해상 운반책, 양륙책, 감시책, 육상 운반책, 보관책, 자금책으로 역할을 세분화해 조직을 체계화했다. 그러나 정부가 밀수를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면서 1972년 검거돼 징역 4년과 벌금 1400만원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됐다.
이황순은 수감 이듬해 폐결핵 진단으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소한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경남 진주의 한 돼지 사육장이었다. 그곳에서 '교수'로 불리던 마약 밀조 기술자에게 히로뽕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수감 이듬해인 1973년 폐결핵 진단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소했다. 출소 일주일 만에 자취를 감춘 이황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경남 진주의 한 돼지 사육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교수’로 불리던 마약 밀조 기술자로부터 1대 1로 히로뽕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히로뽕은 메스암페타민의 일본식 발음으로 감기약 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진 강한 각성제였다.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이를 피로회복제로 상품화하며 ‘필로폰’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명칭이 일본식 발음인 ‘히로뽕’으로 한국에 전해졌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인들에게 지급되며 사회 문제가 되자 이후 제조자에게는 사형까지 구형할 정도로 처벌이 강화됐다.
그러나 일본 야쿠자들은 돈이 되는 히로뽕 사업을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 대상이 바로 이황순이었다. 이황순은 밀수 경험과 제조 기술, 일본과의 연결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일본에 히로뽕을 판매하는 일을 애국 행위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집 거실에 태극기를 걸어두고 일본을 히로뽕으로 망하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1979년 12월 인천항에서 금괴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인천지검에는 ‘밀수범 잡는 호랑이’로 불리던 윤재기 검사가 부임해 있었다. 히로뽕 범죄의 뿌리를 뒤흔든 사건은 뜻밖에도 이 금괴 도난 신고에서 비롯됐다. 밀수범 안모씨가 금괴를 도둑맞았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당시 인천항은 부산 기반 밀수조직이 활동 범위를 넓혀 세력을 미치는 중이었다. 사건을 맡은 윤재기 검사는 안씨의 입을 열기 위해 애국심을 자극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안씨 어머니의 이력을 언급하며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등의 수법으로 안씨로부터 밀수 조직의 핵심 정보를 확보했다.
며칠 뒤 인천항으로 입항한 밀수선 기관실에서는 녹용과 고급 시계, 우황청심환과 함께 히로뽕 제조 핵심 원료 염산 에페드린 250kg이 발견됐다. 히로뽕 제조에 사용되는 핵심 원료였다. 윤 검사의 조사 끝에 염산 에페드린의 최종 구매자이자 히로뽕 제조 책임자의 이름이 나왔다.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6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밀수 조직의 상선이자 대부 이황순이었다.
1980년 3월 19일 부산지검 특별수사반은 학산별장에서 체포 작전을 감행했다. 이황순은 총을 쏘고 맹견을 풀며 저항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수사팀은 진입해 그를 체포했다. 수색 결과 장미 정원 아래 지하 통로와 히로뽕 밀조 시설이 드러났다. 하수인들은 수도검침원이나 책 장수로 위장해 드나들며 리어카로 히로뽕을 외부로 반출했다.
이황순은 결국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그의 이후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만기를 채웠다면 1990년대 중반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