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부산 민락동 언덕 위 ‘학산별장’ 정원에는 장미가 가득했고, 독일산 셰퍼드 5마리가 집을 지켰다. 마을과는 단절된 채 오직 “수도검침원만 드나든다”는 소문만 돌았다. 그 집 주인은 훗날 신문 지면을 뒤덮은 이름, 히로뽕 밀조 조직 두목 이황순이었다.
이황순은 충북의 한 대학교에 입학한 뒤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대학을 중퇴한 뒤 부산으로 향했다.
그가 택한 길은 조직폭력배였다. 폭력조직 ‘칠성파’에 가입한 그는 1960~70년대 부산 지하세계가 ‘밀수’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 자연스럽게 밀수에 손을 댔다. 당시 부산은 대마도와 거리가 가까웠고, 일본산 물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국제시장 등을 중심으로 밀수품 거래가 일상처럼 벌어졌다.
이황순은 소형 밀수선이 아닌 합법 무역선을 활용한 대형 밀수에 나섰다. 해상 운반책, 양륙책, 감시책, 육상 운반책, 보관책, 자금책으로 역할을 세분화해 조직을 체계화했다.
그러나 정부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단속에 나선 결과, 1972년 2월 그는 결국 검거돼 징역 4년과 벌금 1400만원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수감 이듬해인 1973년 폐결핵 진단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소했다. 출소 일주일 만에 자취를 감춘 이황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경남 진주의 한 돼지 사육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교수’로 불리던 마약 밀조 기술자로부터 1대 1로 히로뽕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다.
히로뽕의 본래 명칭은 메스암페타민이다. 감기약 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 물질은 강한 각성 효과를 지녔다. 일본의 한 제약회사가 이를 피로회복제로 상품화하며 ‘필로폰’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명칭이 일본식 발음인 ‘히로뽕’으로 한국에 전해졌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의 각성을 위해 히로뽕을 대량 지급했고, 전쟁 이후 중독자가 급증하며 사회 전체가 마약 문제에 잠식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제조자에게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을 정도로 처벌을 강화했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은 뜻밖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돈이 되는 히로뽕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일본 야쿠자들이 제조 거점을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들이 눈여겨본 사람은 이황순이었다.
밀수 경험과 제조 기술, 야쿠자와 손잡은 이황순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일본에 히로뽕을 파는 일을 ‘수출’이라고 불렀고, 이를 애국처럼 포장했다. 집 거실에는 태극기를 걸어두고 일본을 히로뽕으로 망하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은 흘러 1979년 12월, 인천항. 이황순에게 나비 효과를 불러올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시기 밀수 조직들은 부산을 넘어 인천항까지 루트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때 인천지검에는 ‘밀수범 잡는 호랑이’로 불리던 윤재기 검사가 부임해 있었다.
히로뽕 범죄의 뿌리를 뒤흔든 사건은 뜻밖에도 금괴 도난 신고에서 비롯됐다. 밀수범 안모씨가 금괴를 도둑맞았다며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사건을 맡은 윤재기 검사는 안씨의 입을 열기 위해 애국심을 자극하는 방식을 택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안씨 어머니의 이력을 언급하며 태극기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게 했고 결국 안씨는 눈물을 흘리며 밀수 조직의 핵심 정보를 털어놓았다.
며칠 뒤 인천항으로 입항한 밀수선의 기관실에서는 녹용과 고급 시계, 우황청심환과 함께 염산 에페드린 250kg이 발견됐다. 히로뽕 제조에 사용되는 핵심 원료였다.
윤 검사의 조사 끝에 염산 에페드린의 최종 구매자이자 히로뽕 제조 책임자의 이름이 나왔다.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6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밀수 조직의 상선이자 대부 이황순.
1980년 3월 19일, 부산지검 특별수사반은 학산별장에서 체포 작전에 나섰다. 이황순은 총을 쏘고 맹견을 풀며 격렬히 저항했고, 설득 과정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수사팀은 끝내 실내에 진입해 그를 체포했다.
수색 결과, 장미 정원 아래에는 지하 통로와 히로뽕 밀조 시설이 숨겨져 있었다. 겉으로는 호화 별장이었지만 지하는 마약 공장이었다.
하수인들은 수도 검침원이나 책 장수로 위장해 드나들며 리어카를 이용해 히로뽕을 외부로 반출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황순은 결국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그의 이후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만기를 채웠다면 1990년대 중반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