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이 별게 아니다! 일본에 뽕 팔믄 그게 바로 애국인기라” 2018년 개봉한 영화 ‘마약왕’(감독 우민호)의 주인공 이두삼(송강호 분)은 마약도 수출품이라며 애국을 말한다. 일본에 히로뽕을 팔아 망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마약 밀수업자인 이두삼은 일본에서 필로폰 원료를 수입해 부산에서 마약을 만들어 다시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일으켜 거대한 부를 거머쥔다. 영화 ‘마약왕’은 대한민국 최대 마약왕이었던 한 실제 인물을 고증해 만들어졌다. 그 인물이 바로 이황순이다. 충북 청주 출신의 그는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해 살았다. 그가 지내던 곳은 부산 민락동에 위치한 ‘학산별장’. 고급 별장답게 정원엔 장미가 가득했고 잘 훈련된 맹견도 여러 마리 키웠다. 집 주변에 접근하는 외부인을 감지하는 고성능 음파탐지기가 집에 있을 정도로 호화로운 집이었다. 1960-70년대 부산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밀수 사업이 호황을 누릴 때였다. 청주를 떠난 이황순은 부산의 폭력조직 ‘칠성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부산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칠성파는 여느 지하조직과 마찬가지로 일본 대마도와 한국 부산을 오가는 밀수선을 잡아 밀수품 거래로 돈을 벌고 있었다.
1990년 1월 4일 새벽 부산 낙동강변 갈대숲에서 3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한겨울 강바람이 매서운 시간이었다. 피해자의 상의와 속옷은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고 하의는 벗겨진 상태였다. 외형만 놓고 보면 성폭력을 동반한 강력범죄 가능성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초기 수사의 출발점은 함께 있었다는 남성 A씨의 진술이었다. 그는 피해 여성과 이른바 카 데이트를 하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여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괴한 두 명이 차량 안으로 들이닥쳤고 이후 돌아온 여성을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는 설명이었다. A씨는 범인 중 한 명과 물속에서 몸싸움을 벌였고 손목을 묶고 있던 공업용 테이프가 풀리면서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범인들이 자신을 결박하려 하자 차량 트렁크에 테이프가 있다고 직접 알려줬다는 말도 했다. 이 진술은 초기 수사의 토대가 됐다. 그가 기억한 인상착의는 단순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다른 한 명은 작았다는 정도였다. 이는 당시 부산 엄궁동 일대에서 발생하던 연쇄 강도상해 사건의 범인 묘사와 유사했다. 언론은 이들을 이른바 엄궁동 2인조로 불렀다. 그러나 현장에는 뚜렷한 지문이나 결정적 증거는 남지 않았다. 현장에서 약 30m 떨어진 지점에서는
2006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을 앞둔 수형자 A씨는 분류심사 과정에서 뜻밖의 일을 겪었다. 형기의 상당 부분을 채운 그는 담당 교도관으로부터 다음 달 가석방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위력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A씨는 분류심사실에서 담당 교도관 이모씨와 단둘이 마주했다. 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진행된 상담 도중 이씨는 가석방 가능성을 언급하며 기대를 키웠다. 하지만 대화는 점점 A씨의 사적인 영역으로 흘러갔다. 교도관은 “남편과 왜 별거 중이냐”, “이렇게 예쁜데 남편이 왜 바람을 피우느냐”는 등의 질문을 던졌고 분류과에서 작성하는 서류가 중요하며 잘 협조하면 가석방이 빨라질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덧붙였다. 이어 이씨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뒤 A씨에게 다가가 신체를 접촉했다. A씨가 저항했으나 완력으로 제압하고 추행을 이어갔다. A씨가 소리를 지르겠다고 하고 나서야 이씨는 행위를 멈췄다. 이씨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야 가석방이 가능하다며 입단속을 요구했다. A씨는 곧 여성 교도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상부 보고가 이뤄졌고 이씨는 피해자 앞에서 사과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A씨
2009년 3월 25일 오전 경남 창원 명서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 세워진 택시 안에서 50대 기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는 당시 58세였던 강선길 씨였다. 그는 차량 뒷좌석에 쓰러져 있었고 목 부위가 공업용 커터칼로 깊게 절단된 상태였다. 경찰은 차량 내부와 주변을 정밀 수색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뚜렷한 지문이나 DNA를 확보하지 못했다. 인근 CCTV 수백 곳을 확인했으나 택시의 정확한 이동 경로는 특정되지 않았다. 수사팀이 주목한 단서는 운행 기록이 남아 있던 타코미터였다. 분석 결과 범인은 3월 24일 밤 9시 50분쯤 시내에서 강씨의 택시에 올라 시외 지역으로 가자고 한 뒤 약 30분 후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 그해 7월 인근 지역에서 또 다른 택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 시간 흉기로 기사를 위협해 트렁크에 가둔 뒤 현금을 빼앗은 3인조가 검거됐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외국인들로, 경찰은 이들 가운데 19세였던 보조로브 아크말을 창원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아크말은 7월 강도 사건은 인정했지만 3월 살인 사건은 부인했다. 그러나 두 차례 조사 뒤 자백이 나왔다. 그는 명곡교 인근에서 택시에 오른 뒤
1988년 가을 경기도 화성의 한 주택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인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뒤 대한민국 형사사법 시스템을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8차 사건은 진범 이춘재의 자백과 재수사로 소아마비 장애 청년 윤성여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겼다. 재심을 통해 법원은 스스로의 오판과 국가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88년 9월 15일 화성 태안읍 한 가정집에서 13세 박양이 목 압박 흔적과 성폭행 정황이 있는 상태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 방문 문고리 주변 창호지는 찢겨 있었고 경찰은 범인이 담을 넘어 창호지를 찢고 문고리를 따 방으로 들어온 뒤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이불을 덮은 뒤 도주했다고 결론 내렸다. 현장 침구에서는 범인 것으로 추정되는 체모가 채취됐다. 일본으로 보내진 성분 분석에서는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이 검출됐다. 수사팀은 이를 근거로 금속·기계류 종사자를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혔고 당시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22세 청년 윤씨가 지목됐다. 윤씨 체모에서도 티타늄과 중금속이 검출됐고 국과수 감정에서 현장 체모와 같은 B형 혈액형이 확인됐다. 경찰은 이를 결정적 증거로 삼았다. 1989년 7
1975년 1월 2일 새해 벽두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건장한 남성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모여들었다. 서울 최대 폭력조직으로 불리던 신상사파의 신년 모임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출신 신상현이 이끄는 조직은 당시 명동 일대를 장악하며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다. 1970년대 서울 주먹판 한 축은 명동을 근거지로 한 신상사파였다. 평양 ‘박치기’ 상징 이화룡을 중심으로 세를 키운 조직은 명동·을지로 일대 유흥가에서 기름·술·안주 공급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여기에 맞선 세력은 광주·전주·목포·여수 출신 건달들의 연합체, 범호남파였다. 조창조에서 정학고, 오종철, 조양은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심으로 무교동과 종로 일대 유흥가에 뿌리를 내렸다. 점차 명동의 신상사파를 위협하는 신흥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때만 해도 주먹 세계 안팎에선 “칼을 쓰지 않는 맨주먹의 낭만 시대”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사보이호텔에서 벌어진 피습 사건은 그런 환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날 이후, 한국 조폭 세계의 폭력 양상과 권력 지형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의 도화선은 범호남파 두목이던 오종철의 후배 이모씨가 신상사파에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됐다.
1998년 1월 3일 오후 3시 10분경, 대구 남구 대명11동의 한 비디오 대여점인 ‘장미 비디오’의 30대 여주인은 여섯 살 된 막내아들에게 짜장라면을 끓여주고 있었다. 평범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던 모자는 곧 들이닥칠 불행에 대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잠시 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성은 흉기를 휘둘렀고, 여주인은 13차례나 찔린 채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3시간 만에 숨졌다. 현장을 목격한 이는 어린 아들뿐이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인근 상점으로 달려가 “강도가 우리 엄마를 찔렀다”라고 외쳤다. 물증 없는 살인사건…경찰 “범인 자백 받아냈다” 수사는 곧바로 시작됐지만, 사건 현장에서는 지문이나 DNA, 흉기 등 결정적 물증이 확보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서는 아이가 떠올린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라는 인상착의뿐이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틀 뒤, 사건 현장 인근에서 불심검문을 받던 20세 청년 이민형씨가 체포했다. 그는 군 복무 중 탈영 상태였고, 경찰은 그가 탈영 후 대구 등지에서 여러 건의 강도·절도를 저질렀으며, 장미 비디오 가게 살인 역시 그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자신을 촬영하러 온 수많은 카메라 앞에 공개적
조선족 선원, 그리고 첫 항해의 시작 약 30년 전 1996년 8월 2일 새벽, 남태평양 사모아 인근을 항해 중이던 254톤급 온두라스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한국 해운 역사상 최악의 선상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 선원 6명이 일으킨 반란으로 총 11명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였다. 1996년 6월 7일, 최씨를 선장으로 한 원양어선 ‘페스카마호’가 부산 남항을 출항했다. 선장을 포함해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10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페스카마호는 부산항을 출발해 8일간 항해한 끝에 괌 인근 ‘타니안 섬’에 도착했다. 이번 경유는 부산항에서 미처 조달하지 못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 추가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한국인 수뇌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선원을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선장은 출항 전부터 이미 회사 측에 인력 보강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해왔고 조선족 선원 7명이 새로 승선했다. 폭행을 멈춰달라…멈추지 않은 폭력의 일상 페스카마호의 선장 최씨에게 이번 항해는 선장으로서의 첫 출항이었다. 승선한 선원들 상당수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들이었고 최 선장 역시 숙련된 지휘 경
2022년 5월 22일 오전 5시 부산 서면의 한 오피스텔 공동현관 앞, 20대 여성 김모씨는 귀가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뒤따라 들어온 이모(당시 30세)씨가 갑자기 발길질로 김씨의 머리 뒤쪽을 가격했다. 이른바 ‘돌려차기’였다. 피해자는 벽면에 부딪힌 뒤 바닥에 쓰러졌다. 가해자는 쓰러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먼저 빼앗았다. 이후 머리 부위를 향해 발길질을 이어갔다. 첫 공격이 이뤄진 뒤 피해자가 의식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수 초 사이에 상황이 급변했다. 이씨는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어깨에 둘러멘 채 CCTV가 닿지 않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약 7분 뒤 그는 피해자를 1층 복도에 내려둔 채 현장을 떠났다. 피해자는 입주민에 의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고 외상성 두개 내 출혈 등 중대한 뇌손상 진단을 받았다. 발목 부위 역시 후유장애 가능성이 제기됐다. 수사에 나선 부산경찰청은 주변 CCTV를 토대로 동선을 추적해 사흘 만에 부산 시내 한 숙박업소에서 이씨를 검거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로 확인됐다. 이씨는 체포 직후 피해자가 자신을 노려본 것 같아 기분이 상해 범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
2018년 10월 31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사랑하는 딸이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유족의 사연이었다. 유족은 잔인하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엄벌에 처해달라고 호소했다. 피해자는 23세의 A씨, 가해자는 A씨와 교제 중이던 28세의 남성 B씨였다. A씨는 2014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의 K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해 학교 근처의 스피치 어학원에 등록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B씨도 해당 어학원에 다녔다. B씨는 A씨에게 자신을 K대학 동문이라 소개하고 친밀감을 보이며 A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았지만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 후 4년이 흘러 A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한 대기업에 취업했다. 2018년 7월 어느 날, A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B씨였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회에서 인턴을 마친 뒤 춘천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짝사랑해 왔는데 준비가 되지 않아 말하지 못했고, 이제는 결혼 준비가 다 되어 연락을 했다”라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다. B씨는 A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