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 살인 8차 사건, 30년 만에 드러난 오판…국가가 씌운 살인 누명

 

1988년 가을 경기도 화성의 한 주택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살인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뒤 대한민국 형사사법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사건이 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던 ‘화성 8차 사건’은 진범 이춘재의 자백과 재수사를 거치며 소아마비 장애 청년에게 씌워졌던 살인 누명을 벗겨냈다. 그리고 재심 재판을 통해 법원이 스스로의 오판과 국가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1988년 9월 15일 화성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자던 13세 박 양이 목 압박 흔적과 성폭행 정황이 있는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다. 방문 문고리 주변 창호지는 찢겨 있었고 경찰은 “범인이 담을 넘어 침입해 창호지를 찢고 문고리를 따 방으로 들어온 뒤 성폭행과 살해를 저지른 후 이불을 덮어놓고 도주했다”고 결론 내렸다.

 

 

현장 침구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가 채취됐다. 경찰은 이 체모를 일본에 보내 성분 분석을 의뢰했고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이 검출됐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수사팀은 이를 근거로 수리공과 용접공 등 금속·기계류 종사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좁혔고 당시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22세 청년 윤성여씨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윤 씨의 체모에서도 티타늄 등 중금속이 검출됐고 국과수 감정에서 현장 체모와 같은 B형 혈액형이 나왔다는 점이 ‘결정적 증거’로 제시됐다.

 

1989년 7월 25일 경찰은 체모 성분 분석 결과 등을 근거로 윤 씨를 검거했다. 이틀 뒤인 7월 27일 윤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을 자백했고 법원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며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윤 씨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아이가 어떻게 담을 넘어 남의 집에 침입해 살인을 저지르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1980년대 수사와 재판 환경은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중퇴에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까지 여읜 상태였다. 사선 변호인을 선임할 여력은 없었고, 국선변호인을 통해 재판을 받았지만 변호인은 피고인의 주장과 달리 유죄를 전제로 한 양형 감경에 초점을 맞춰 변론하고 결심공판 때는 아예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윤 씨가 고문과 강압수사를 당했다는 정황은 이후 여러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강간도 안 했고 살인도 안 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때 자백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체포 이후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은 채 조사가 이어졌고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키며 하지 못하면 구타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수사팀에는 대공과 방첩 수사,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던 형사가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증거가 뚜렷해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고 부인했으나 “증거가 없을 때 고문을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남겨 과거 수사 관행에 대한 비판을 키웠다.

 

사건이 다시 관심을 받은 것은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 개봉 이후였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화제가 되면서 각종 시사 프로그램이 화성 사건을 재조명했고 MBC ‘실화극장 죄와 벌’ 등에서 윤 씨는 “8차 사건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며 수사 과정의 가혹행위를 호소했다.

 

그러나 진범이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심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출소 이후에도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재심 가능성을 알아봤지만 “진범이 특정되지 않으면 뒤집기 어렵다”는 벽에 가로막혀야 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이미 지난 2019년,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춘재가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10건의 연쇄살인과 추가 범행을 자백했다. 특히 그는 8차 사건 또한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진술했다.

 

이춘재의 집은 당시 피해자 집과 한두 집 건너 이웃이었고, 사건 초기에도 용의선상에 올랐던 인물이지만, 당시 수사는 “혈액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배제하고 오히려 윤 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재심 준비 과정에서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남겨둔 옛 취재 기록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30년 전 수사 서류 대부분이 사라진 상황에서, 과거 프로그램 취재 당시 보관해둔 사건 파일이 캐비닛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는 재판에서 ‘증거 1호’로 채택됐고 억울한 옥살이를 드러내는 증거로 되살아났다.

 

 

2020년 12월 17일 수원지법 형사12부는 1989년 선고된 원심을 파기하고 윤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잘못된 수사와 과학 감정 그리고 이를 검증하지 않은 재판으로 인해 피고인이 억울한 옥고를 치렀다”며 “사법부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윤 씨 곁을 지킨 한 교도관의 존재도 세상에 알려졌다. 청주교도소에서 근무한 박종덕 교도관은 1990년대 윤 씨를 처음 담당한 뒤 수형자와 교도관으로 17년, 출소 후에는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왔다.

 

사회가 윤 씨를 ‘아동 성폭행 살인범’으로 낙인찍었지만 박 교도관은 그의 언행과 수용생활을 지켜보며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건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과 영치금을 보태고 출소 뒤에는 일자리까지 알아봐 주며 재심을 도왔다. 윤 씨는 방송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유일하게 믿어 준 사람”이라고 말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연극 <담장 밖으로>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화성 8차 사건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고문과 강압수사를 막을 제도적 장치, 과학수사에 대한 검증 체계, 국선변호의 실효성, 공권력 견제 기능이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결국 ‘또 다른 윤성여’를 막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