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의 깊은 산골, 첩첩산중 사무곡.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오지에서 영자양과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 캐기로 생계를 이어갔다. 영자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1주일을 다닌 것이 전부였다.
1997년, 오지 전문 사진작가 이지누 씨가 이들을 찾아갔다. 이후 몇 차례 방문하며 부녀와 친분을 쌓았고, 1999년 한 잡지에 영자 부녀의 삶을 소개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글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켰다. 방송국들이 영자 부녀를 찾아 나섰고, 결국 2000년 7월, KBS 2TV의 ‘인간극장’에서 ‘그 산골엔 영자가 산다’라는 제목으로 5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도시인들은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녀의 모습에 열광했다. 영자의 순박한 미소와 소박한 삶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고, 전국에서 후원금과 선물이 쏟아졌다.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도 출연하며 영자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영자의 삶은 급격히 변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그녀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방송을 통해 “영자가 산골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제작진들이 나서서 “딸의 인생을 망칠 일 있냐”며 설득하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영자는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닥쳤다.
2001년 2월 12일, 영자의 아버지가 산골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큰아버지가 찾아가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현장을 대충 살펴보고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신을 닦던 영자가 왼쪽 쇄골 부위에서 깊은 상처를 발견했고 경찰은 살인 사건으로 수사를 재개했다. 한 달 뒤인 3월 13일, 범인으로 양 씨(당시 53세)가 체포됐다.
양 씨는 전과 7범의 강도·절도범으로,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인간극장을 시청하고 영자 부녀가 유명해진 것을 알게 됐다. CF 출연료와 후원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출소 후 두 차례 답사를 마친 뒤, 2001년 2월 9일 밤 영자의 아버지가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갔다.

양 씨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 돈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하자 흉기로 왼쪽 쇄골을 찌르고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단돈 12만4천 원뿐이었다. 양 씨는 이 돈을 들고 도망쳤고, 도망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방에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사용하다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영자는 눈물 속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집 근처에 산소를 마련하고 모시려고 했지만 친척들은 화장을 권유했다. 이를 받아들인 영자는 아버지 시신을 화장해 사무곡으로 오르는 길가에 뿌린다. 아버지의 위패는 삼척에 있는 한 사찰에 모셨다.
그런데 영자의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불과 보름 뒤인 2월 27일, 영자의 후원회장이었던 김 씨가 그녀의 CF 출연료와 후원금 700만 원을 가로 챈 것이다.
영자는 “세상이 무섭다”며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과 단절했다. 그녀는 결국 강원도의 한 절로 귀의해 비구니가 되었다.
영자가 절에 들어가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출판사에서는 ‘영자 아버지의 유고 시집’을 출간하겠다고 발표했다. 출판사 대표는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유고 시집을 출간한다”고 밝혔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한 시인이 양심선언을 하면서 “이 시집은 전부 내가 창작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죽은 영자의 아버지를 이용해 또 한 번 돈벌이에 나선 것이다.

속세를 떠난 영자는 ‘도혜’라는 법명을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는 삼척의 한 암자에서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친척조차 “연락이 끊겼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싶어 했다.
몇몇 언론은 여전히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한 스님은 “도혜 스님은 만나길 원치 않는다. 그녀는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깊은 상처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