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1심 선고 직후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 몰랐다”며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억울함, 후회, 불안, 그리고 ‘이제 끝난 걸까’ 하는 절망이 뒤섞인 얼굴들이다. 그러나 형사사건을 오래 다루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형사사건은 1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판결 직후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항소심은 단순한 재검토 절차가 아니다. 기존 판단의 타당성만을 되짚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와 변화된 태도를 바탕으로 사건을 다시 구성하는 재판이다. 1심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이유의 상당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심에서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절차가 항소심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시간을 되돌리는 재판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를 제출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소심은 1심이 어떠한 논리와 근거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최근 국회를 통과한 형법 개정안은 사기죄, 컴퓨터등사용 사기죄, 준사기죄의 법정형을 기존 징역 10년에서 최대 20년, 가중 시 징역 30년까지 가능하도록 크게 상향했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투자리딩방 등 불특정 다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조직형 사기 범죄에 강화된 처벌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형량 인상이라는 조치가 실제 사기 범죄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질지는 별도의 문제다. 형사사법 현장에서 수많은 사기 사건을 다뤄본 변호사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개정은 분명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중요한 한계도 드러낸다. 무엇보다 형량을 높이는 것만으로 범죄가 감소한 사례는 거의 없다. 사람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 형량을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은 '나는 안 잡힐 것'이라는 심리에 기반해 행동한다. 충동적 범행이나 조직적 지시에 따른 범죄에서는 형량 자체가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더 흔하다. 범죄 심리 연 구에서도 ‘처벌의 엄격함(severity)’보다 ‘처벌의 확실성(certainty)’이 행동 억제에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해 왔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사기 구조의 특성이다. 최근 캄보디아 등 해외에 본거지를 둔
조진웅 배우가 소년범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마녀사냥과 다름없는 여론 몰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이리도 가혹하고 세상은 왜 이토록 냉정한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는 1992년 1월 당시 천안소년교도소(현재는 ‘천안교도소’)에 9급 교도관으로 임용되면서 교도관 생활을 시작해, 30년 중 17년을 소년수용자들과 함께 보냈다. 소년교도소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소년수들의 상처받고 비뚤어진 마음을 다독였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성직자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교화·개선을 도모하고, 심리치료·음악치료·미술치료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소년수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교정기관에서도 수용자들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당시 천안교도소에는 지역 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매주 교도소를 방문해 소년수들의 연극 지도를 하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성껏 연극반 수용자들을 지도해 천안시민회관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연극을 통해 소년 수용자들의 마음을 치료했던 조동희 교수님의 이야기다. 그의 소탈한 성격과 인자한 웃음을 통해 많은 소년수들이 새
성범죄 피의자로 입건되는 순간 사람들은 흔히 상상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억울하다는 마음이 앞서기도 하고 ‘수사에 성실히 임하면 진실이 드러나겠지’ 하는 기대를 품기도 하지만, 현실의 수사·재판 절차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성범죄 사건은 특성상 직접증거가 많지 않고, 결국 피해자와 피의자의 진술이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에 ‘초기 대응’이 사건의 향방을 거의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조사는 특히 중요하다. 수사기관이 처음 작성하는 피의자 진술조서는 이후 모든 판단의 기준점이 된다. 이때 피의자는 종종 ‘솔직하게 말하면 오해가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며 준비 없이 진술에 나서곤 한다. 그러나 수사 기록에 남는 문장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항상 존재한다. 말의 앞뒤가 잘려 기록되기도 하고, 표현이 과장되거나 부정확하게 기재되기도 한다. 이후 진술을 ‘수정’하게 되면 진술 자체의 신빙성이 흔들려 불리함이 커진다. 따라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추측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당시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떠올려 정리한 뒤 조사에 응하는 편이 안전하다. 수사기관에서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비칠
성범죄 사건에서 합의는 가해자에게는 형사처벌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되고, 피해자에게는 실질적인 회복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격적 침해를 금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의금은 늘 논란과 갈등을 낳는다. “얼마가 적정한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 합의는 ‘형법’ 제51조의 ‘범행 후 정황’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감경 요소로 평가된다. 특히 처벌불원 의사가 포함된 합의는 양형기준상 특별감경 사유로 작용하여 실형과 집행유예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대구고등법원 2018. 9. 20. 선고 2018노242 판결)(서울북부지방법원 2019. 1. 11. 선고 2018고합383 판결). 다만 법원은 합의서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합의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졌는지, 합의금이 범죄의 중대성에 비추어 적절한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 세심하게 따진다. 미성년자나 장애인처럼 취약한 피해자와의 합의라면 그 진정성을 더욱 엄격히 심사하는 것이 최근 판례의 흐름이다(대구고등법원 2018. 9. 20. 선고 2018노242 판결). 반대로, 겉으로는 합의가 이루어졌더라도 강압적 분위기에서 합의서가 작성되었거
범죄에 연루된 이들 가운데 자신이 단순 가담자라고 생각했음에도 재판에서 공동정범으로 인정되면서 예상보다 훨씬 큰 추징금을 선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실제로 손에 쥔 이익이 거의 없는데도 공동정범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체 범죄수익의 일정 부분을 부담하게 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출소 이후 생계 유지 자체가 가능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번 칼럼은 이러한 문제를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실제 집행에서 어떤 완충 장치가 있으며, 출소자가 어떤 사회복귀 전략을 취할 수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형법 제30조는 2인 이상이 ‘공모’하여 각자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적 행위 지배’가 있을 경우 공동정범으로 규정한다. 판례는 여기에 더해 범행 수행 과정에서 본질적 기여를 한다는 인식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정범 책임을 인정해 왔다. 도박장 딜러·현금 수거책·계좌 제공자 등이 공동정범으로 판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넓은 공동정범 인정은 범죄 조직의 분업 구조 속에서 ‘말단’ 역할이라 해도 전체 범행 실현에 필수적이라면 동일한 책임을 묻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공동정범 성립에는 치밀한 공모가 필수적이지 않다. 순차적·암묵적으로 의사가 상통한 경우에도 공모
<더시사법률>을 구독해 주시는 분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유난히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변호사님, 제 사건도 제대로 봐주셨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라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었을까’, ‘그때 누군가 내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해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변호도 시작된다. 사건을 단순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실과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변호인의 첫 번째 역할이기 때문이다. 최근 마주한 사건은 겉으로 보기엔 흔한 음주 운전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 의뢰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97%였다. 법정 기준을 넘긴 알코올 수치에 이미 기소까지 이뤄진 상태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전형적인 유죄 사례다. 그러나 사건의 면면을 자세히 파헤쳐 보니, 이 사건은 보통의 음주 운전 사건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 의뢰인은 술을 마신 후 집에 돌아가기 위해 평소처럼 대리기사를 호출해 운전대를 맡겼다. 대리기사가 있었음에도 종내엔 주취자 본인이 음주 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문제는
초코파이 한 개, 커스터드 한 개. 얼마 전, 고작 1050원어치 간식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금액만 놓고 보면 “이게 정말 뉴스에 오를 일인가?” 하는 의문이 먼저 들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의 시각에서 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안이야말로 형사 사건이 왜 늘 어려운지, 왜 기록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처음 사건을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일 것이다. “이 정도를 절도라고 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법률가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형법상 절도죄는 단순한 구조를 가진 범죄다. 타인의 재물을 소유자의 의사에 반하여, 불법영득의 의사로 가져가면 그 자체로 절도가 성립한다. 이 조문 어디에도 ‘금액이 적으면 예외’라는 문구는 없다. 법은 언제나 구성요건을 기준으로 판단할 뿐, 일상의 상식이나 관행을 먼저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 사건조차 법리적으로는 무겁게 흘러갈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여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법이 포착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번 사건에서
우리 사회는 범죄자에 대한 처우를 둘러싸고 ‘엄벌’과 ‘교정·재활’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오랜 시간 고민을 이어왔다. 이 논의의 중심에는 항상 가석방 제도가 자리한다. 가석방은 일정 기간 복역한 수형자가 교정 성과를 보이고 재범 위험이 낮다고 판단될 경우 남은 형기를 사회 내에서 보호관찰과 함께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로, 형벌 체계의 예외가 아니라 현대 교정학의 기본 원리에 부합하는 정상적 구성 요소이다. 책임주의와 최종 수단성, 사회적 방위, 재사회화라는 형벌 원리를 고려할 때 가석방은 형 집행을 탄력적으로 운영하여 단계적 사회복귀를 돕는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가석방 운영은 법 규정보다 훨씬 제한적이고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법은 유기형 1/3, 무기형 20년 복역 시 가석방이 가능하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 심사에서는 형 집행률 70% 이상이 사실상 기준이 되며 70% 미만의 가석방은 매우 드물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의 자료에서도 가석방자의 대다수가 형기의 70%를 넘긴 뒤에야 풀려난 것으로 나타나 법의 취지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행은 수형자가 교정 프로그램 참여나 모범적 수용생활을 유지할 동기
검찰청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의 수사 체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경찰 경제범죄수사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수사의 시작과 끝이 검사에게 있었던 시기를 경험했다. 경찰이 아무리 사건을 파고들어도 최종 판단은 검사 몫이었고, 사건은 일괄적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복잡한 사건일수록 검사의 지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심지어 수사자료표 작성과 지문 채취도 ‘기소 의견’ 사건에서만 이뤄졌다. 당시에는 ‘조금만 복잡하면 일단 송치하고 검사 지휘를 받자’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고, 검사와 소통이 잘되는 수사관들일수록 직접 전화하거나 면담을 요청해 수사의 방향을 확인하곤 했다. 결국 경찰이 표면적으로 수사를 하더라도 사건의 실질적 주도권은 검사에게 있었다. 그 후 필자가 검찰로 전직했을 때 마침 경찰에게 수사종결권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경찰이 자체적으로 불송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고, 검사의 수사지휘권은 ‘보완수사 요구’ 혹은 ‘재수사 요청’이라는 이름으로 대폭 축소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름만 바뀐 듯 보일 수 있지만 실무에서는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보완수사 요구는 기관 간 문서 교환 방식이어서, 검사가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