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선원, 그리고 첫 항해의 시작
약 30년전 1996년 8월 2일 새벽, 남태평양 사모아 인근을 항해 중이던 254톤급 온두라스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한국 해운 역사상 최악의 선상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 선원 6명이 일으킨 반란으로 총 11명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6월 7일, 최씨를 선장으로 한 원양어선 ‘페스카마호’가 부산 남항을 출항했다. 선장을 포함해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10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선박은 8일간의 항해 끝에 괌 인근 ‘타니안 섬’에 도착했다. 경유 목적은 부산항에서 조달하지 못한 물자를 보급하고, 목표 어획량 달성을 위해 추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 선원 7명이 새로 승선했다.
페스카마호는 부산항을 출발해 8일간 항해한 끝에 괌 인근 ‘타니안 섬’에 도착했다. 이번 경유는 부산항에서 미처 조달하지 못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 추가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한국인 수뇌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선원을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선장은 출항 전부터 이미 회사 측에 인력 보강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해왔고 조선족 선원 7명이 새로 승선했다.
폭행을 멈춰달라…멈추지 않은 폭력의 일상
페스카마호의 선장 최씨에게 이번 항해는 선장으로서의 첫 출항이었다. 승선한 선원들 상당수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들이었고 최 선장 역시 숙련된 지휘 경험이 없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조선족 선원들은 작업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한국인 선원들로부터 잦은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다.
6월 26일, 조선족 선원 6명은 갑판장과 선장의 가혹 행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행을 멈춰달라”는 취지의 편지를 작성했다. 이들은 일등항해사 이씨에게 편지를 건넨뒤 이를 선장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편지는 끝내 선장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무장 대치로 번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다음날, 배는 조업 지역에 도착해 선원들은 일을 시작했다. 외국인 선원들은 여전히 조업이 미숙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선장이 쇠파이프로 조선족 한 명을 폭행했다. 해당 조선족은 폭행을 당하자 선장의 얼굴을 손으로 가격한 뒤 참치 처리용 칼을 집어들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조선족 선원들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이 합세하면서 이에 한국인 선원들이 칼과 몽둥이, 도끼 등을 들고 무장 대치에 나섰다. 이때 조선족 이등항해사였던 전재천씨는 대치에 가담하지 않고 양 측의 중재를 맡았다. 당시 전씨는 이등항해사라는 높은 지위로 인해 한국인 선원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하선을 요구하다…‘이 배에서 내려가고 싶다‘
조선족 선원들은 “더이상 배에서 작업을 못하겠으니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전날 일등항해사를 통해 전달한 편지 때문에 폭행당했다고 생각했다. 선장은 전씨에게 이 사실을 전달받고 이씨를 불러 편지에 대한 사실 확인을 진행했다. 이씨가 편지를 전달하지 못한 사실을 확인하자 선장은 이씨를 질책하고 폭력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사과했다.
이후 선장과 갑판장의 폭행은 줄어들었지만 업무 강도는 줄지 않았다. 당시 조선족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매달 일정한 급료를 받았으나, 한국인 선원들은 어획량에 따라 실적급을 받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 선원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선 외국인 선원들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잠을 재우지 않고 일을 시키는 등 과도한 노동을 강요했다.
한 달 뒤인 7월 28일, 높은 업무 강도로 인해 조선족 6명이 하선을 요구했다. 이등항해사 조선족 전씨도 갑판장과의 갈등으로 하선보고서를 제출했다. 이틀 뒤 선장은 “그래 너희 소원대로 해 주겠다”며 1등항해사에게 조선족 선원 중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징계사항이 적힌 하선증명서에 서명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족들은 ‘증명서’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손도장을 찍었다. 이들에 따르면 서류 뒷면에는 “선장에게 흉기를 들고 폭행을 가해 살해하려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폭행을 말렸던 이등항해사 전재천씨도 하선증명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문제는 해당 하선증명서에 ‘사모아 구류와 왕복 항공료, 조업 거부에 따른 조업 손실 등 일체 비용을 하선자가 부담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들은 하선증명서에 적혀있던 금액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다시 일을 하겠다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절망이 반란으로…조타실에서 벌어진 살육
8월 1일 밤 8시, 조업 복귀 요청이 거부되자 조선족들은 침실에 모여 신세 한탄을 이어갔다. 이 때 누군가가 “죽을 바엔 우리 가족의 행복을 끊은 선장을 죽이고 죽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장과 갑판장 등을 살해하기 위한 모의를 시작했다. 선장 등을 유인하는 일은 한국인 선실 출입이 자유로웠던 전씨가 맡게 됐다.
다음날 오전 3시, 전씨는 “다른 선박이 호출했다”며 선장을 불렀다. 이어 선장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 조타실 안에서 대기 중이던 조선족들은 선장을 칼로 살해한 뒤 곧바로 해상에 유기했다. 이어 갑판장, 기관장 등 한국인 선원 7명을 살해했다.
8월 2일 오전 7시, 살인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 1명과 인도네시아 3명은 냉동 어창에 감금됐다. 이들은 5일간 생존했지만 결국 끌려나와 바다에 던져졌다.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생존했던 일등항해사 이씨였다.
24일 조선족들이 식량을 가지러 어창으로 들어간 틈을 타 이씨가 남아있는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함께 어창 문을 밖에서 잠갔다. 조타실로 달려간 전씨도 현장에서 제압돼 결박됐다. 다음 날 아침,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접근하며 사건은 종료됐다.
가해자는 중국인, 피해자는 한국인…온두라스 배의 재판은 어디서?
일본해상보안청이 조선족들을 체포한 뒤 이들에 대한 재판을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 논란이 됐다. 가해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들이었고, 피해자는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 배는 온두라스 선박, 체포는 일본 경찰이 집행했다.
형법 제4조는 “대한민국 영역 외에 있는 대한민국의 선박 또는 항공기 내에서 죄를 범한 외국인에게 적용한다”로 규정한다. 해당 법과 마찬가지로 선박이나 항공기의 경우 운항의 국적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온두라스는 한국인이 최대 피해자라는 이유로 재판을 포기했고 일본은 선원들을 한국으로 이미 인계했다.
이에 형법 제6조 “대한민국영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국민에 대하여 전조에 기재한 이외의 죄를 범한 외국인에게 적용한다”는 속인주의가 적용돼 한국에서 재판이 진행됐다.
이후 페스카마호는 한국에 인계되고 선상 반란 사건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조사 끝에 재판이 시작됐다. 1심에서는 6명 전원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2심에서는 전씨를 제외한 5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대법원은 “선상 가혹행위가 있었던 점을 보면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 사건 범행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공할 범행”이라고 밝혔다. 특히 “전씨는 이등항해사라는 지위에서 범행을 모의했다”며 사형을 확정했다. 살인에 가담한 나머지 5명에 대한 상고도 기각했다.



그리고 “나는 두목이 아니다”
페스카마호 사건 이후 약 10년 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전씨의 사건을 다루며 여러 의문점을 제기했다. 방송 인터뷰에서 전씨는 “나는 주모자가 아니었고 뒤늦게 합류했으며 협조하지 않으면 자신도 죽을 수 있었다”고 호소했다.
그는 선장과 갑판장을 유인할 수 있었던 위치가 자신뿐이었기에, 다른 조선족 선원들이 범행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공모자’로 끌어들였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한 일부 조선족들은 “전재천이 주모한 것이 맞다”고 반박하거나 진술을 거부했다.
전씨는 방송에서 재판 이후 당시 범행에 가담했던 동료 선원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는 “사실 그때 형님을 주모자라고 말하게 된 것은 수사관이 우리에게 주모자를 말하면 중국으로 돌려보낸다고 말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는 수사기관이 진술 대가로 송환을 약속했다는 이른바 ‘사법거래 의혹’을 제기하는 대목이었다.
또 “저는 형님의 억울함을 잘 알고 있어요. 저희들이 살기 위해 형님을 주모자라고 거짓으로 말하는 바람에 저희들 대신 사형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등의 전씨를 변호하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조선족들과 다르게 항해사의 지위에 있었던 그는 선상에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중재자’에서 ‘주동자’가 되었다. 전씨는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면서도 현재까지 “나는 두목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