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월 2일, 새해 벽두. 서울 한복판 명동 사보이호텔에 건장한 사내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모여들었다. 2세대 폭력조직의 대표 격이자 서울 최대 조직으로 불리던 신상사파의 신년 모임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출신 ‘신상사’ 신상현이 이끄는 조직은 당시 명동 일대를 사실상 장악하며 ‘건드릴 수 없는 절대 권력’으로 통했다.
그때만 해도 주먹 세계 안팎에선 “칼을 쓰지 않는 맨주먹의 낭만 시대”라는 미화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사보이호텔에서 벌어진 피습 사건은 그런 환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회칼과 방망이, 쇠파이프가 난무한 그날 이후, 한국 조폭 세계의 폭력 양상과 권력 지형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서울 주먹판의 한 축은 명동을 근거지로 한 신상사파였다. 평양 ‘박치기’의 상징 같은 이화룡을 중심으로 세를 키운 이 조직은 명동·을지로 일대 유흥가에서 기름·얼음·술·안주 공급을 사실상 독점하며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이에 맞선 또 다른 축은 광주·전주·목포·여수 등 호남 출신 건달들이 연합한 범호남파였다. 조창조→정학고→오종철→조양은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심으로 무교동·종로·퇴계로 유흥가에 뿌리를 내린 범호남파는 점차 명동의 신상사파를 위협하는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겉으로는 단순한 ‘지역’ 싸움처럼 보였지만, 당시 양측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신상사파가 ‘서울 중심부 절대 강자’라면, 범호남파는 ‘무교동과 종로를 장악한 도전 세력’이었다.
사건의 도화선은 의외로 사소했다. 범호남파 두목 오종철의 절친이자 후배 격이던 이 모 씨가 신상사파에 집단폭행을 당한 것이다. 경찰대 재학 후 금융권 인사의 보디가드를 맡고 있던 이 씨는 돈 문제로 의뢰인을 경호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우연히 신상현과 마주쳤다. 설전 끝에 “자신의 의뢰인을 끝까지 지키겠다”며 맞섰지만, 결과는 참혹한 구타였다.
오종철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은 1974년 12월 31일. 사보이호텔 725호에는 신상현을 비롯해 부산에서 올라온 주먹 정경식·구환홍, 일본 야쿠자인사 등이 함께 있었다. 방 안에서 여러 차례 몸싸움이 오간 뒤, 이 씨가 정경식·구환홍과 함께 호텔을 나서는 순간, 각종 쇠파이프와 무기를 든 무리가 덮쳤다. 이 씨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복수는 곧장 실행에 옮겨졌다. 오종철은 오른팔 ‘은석’을 부르고, 범호남파의 젊은 행동대장 조양은에게 사보이호텔 급습을 지시했다. 작전은 치밀했다. 호텔 출입구 세 곳을 기준으로 세 개 조를 편성해 신상현의 도주로를 봉쇄한다는 계획이었다.
결전의 날은 1975년 1월 2일로 잡혔다. 호텔 안 연회장에서는 신상사파의 신년 행사가 한창이었다. 서울 전역에서 모여든 조직원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새해를 맞고 있었다. 그때 뒷문 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회칼과 방망이로 무장한 채 호텔 로비를 장악한 범호남파 조직원 30여 명이 행사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조양은의 “우리가 지난번에 진 빚 갚으러 왔소”라는 고함과 동시에 회칼과 쇠파이프가 허공을 갈랐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신상사파 조직원들은 제대로 반격 한 번 못 해본 채 뿔뿔이 흩어졌다. 숫자만 놓고 보면 신상사파가 더 우세했지만, 무기 사용을 전제로 한 집단 공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은 새로운 이름들을 암흑가 전면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우선 신상사파와 가까운 호남 선배들의 신임을 등에 업고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태촌이다. 그는 번개파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신상사파의 후원을 바탕으로 서방파를 결성, 서울 주먹계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범호남파의 실질적 두목이던 오종철을 습격해 불구로 만든 것도 김태촌이었다. 이 보복으로 오종철은 사실상 은퇴했고, 빈자리를 조양은이 물려받아 조직을 ‘양은이파’로 재출범시켰다. “신상사파를 기습한 주역”이라는 소문은 사실과 달리 부풀려졌지만, 조양은에게는 전국구에 이름값을 올려준 상징적 타이틀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