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들과 상담하다 보면 이전에 선임했던 변호사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1심 변호사가 제대로 준비를 안 해준 것 같아요”, “변호사가 제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어요”와 같은 하소연들이다. 항소심을 준비하는 의뢰인이라면 변호사에 대한 절박함은 남다르다. 상고(3심)는 법률 위반이나 중대한 절차 위반 등 제한적인 경우에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항소심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피고인들이 변호사 선임 과정에서, 그리고 선임 이후 변호사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들이 있다. 내 사건에 대해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좋은 변호사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변호사와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형사 절차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크게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피고인과 검사의 대등한 지위 보장 그리고 판사를 설득할 서면의 작성이 그것이다. 형사재판, 특히 항소심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수사 기록과 공판 기록을 손에 쥔 검사와의 펜싱 경기와 같다. 유리한 무기를 손에 쥔 검사와의 대결에서 법률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대등하게 싸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는 검사의 손에 쥐여있는
2017년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되어 형성된 ‘성인지 감수성’ 법리는 우리나라 성범죄 판단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대법원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특수성·맥락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사회구조와 성별 권력관계, 2차 피해 위험 등을 고려해야 한다” 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이후 하급심 역시 이러한 판단 기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또 다른 양상을 보게 되었 다. 성인지 감수성은 본래 실제 피해가 존재함에도 ‘증거 부족’ 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하던 사각지대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리였다. 그런데 이 법리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과 도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향으 로 오남용되면서, 의도치 않게 무고한 가해자가 양산되는 부 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기억의 단편화, 트라우마로 인한 시기 혼동, 진술 과정의 왜곡 등 다양한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완벽하게 일관된 진술’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나는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가 겪는 이러한 현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일관성 결여의 원인이 ‘트라우마 때문인지’, ‘허위신고 때문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이 명확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반복되는 금융사기 피해를 억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전기통신금융사기 범행이 점점 조직화·전문화되면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역할과 책임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강화되는 추세다. 과거에는 범죄 조직과의 직접 접촉 여부나 금전적 이익의 취득 여부 등이 중심적 판단 요소였지만, 최근에는 자금 전달책이나 단순 심부름 단계의 말단 피고인조차 범죄 구조에 기능적으로 기여했다고 보아 공동정범으로 인정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광범 위한 사회적 피해를 차단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흐름이지만, 한편으로는 피고인의 실제 인식과 판단 능력이 충분히 평가되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실무에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낮아진 고의 판단의 문턱이다.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건에서 고의 판단은 더 이상 피고인이 범죄 조직과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범행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당시 정황을 통해 피고인이 불법성을 미필적으로라도 인식할 수 있었는지가 핵심 기준으로 작용한다. 반복적인 인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독립몰수제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독립몰수제란 유죄 판결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 재산이 범죄 수익으로 확인될 경우, 별도의 절차를 통해 이를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환수와 같이 극히 예외적인 사안에서 논의되던 방식을 일반 형사사건 전반으로 확대하자는 구상이다. 범인의 사망이나 도피로 공소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도 범죄 수익은 반드시 환수해 야 한다는 논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필자는 최근 여러 언론을 통해 독립몰수제가 지닌 위헌 성과 구조적 부작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얼핏 보면 이 제도는 장기간의 수사와 재판 절차 속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들 에게 즉각적인 해결책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사 사법 체계 전반에 적지 않은 혼란 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범죄 수익이 제3자에게 귀속된 경우, 국가가 그의 악의를 입증해야만 해당 범죄 수익을 환수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확립된 법리다. 만약 독립몰수제를 이유로 제3자가 선의임에도 국가가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예외를 신설한다면, 이는 민사법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로 이
형사사건을 수행하다 보면 1심 선고 직후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 몰랐다”며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억울함, 후회, 불안, 그리고 ‘이제 끝난 걸까’ 하는 절망이 뒤섞인 얼굴들이다. 그러나 형사사건을 오래 다루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형사사건은 1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판결 직후부터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항소심은 단순한 재검토 절차가 아니다. 기존 판단의 타당성만을 되짚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와 변화된 태도를 바탕으로 사건을 다시 구성하는 재판이다. 1심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이유의 상당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심에서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절차가 항소심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시간을 되돌리는 재판이 아니다.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를 제출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소심은 1심이 어떠한 논리와 근거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최근 국회를 통과한 형법 개정안은 사기죄, 컴퓨터등사용 사기죄, 준사기죄의 법정형을 기존 징역 10년에서 최대 20년, 가중 시 징역 30년까지 가능하도록 크게 상향했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투자리딩방 등 불특정 다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조직형 사기 범죄에 강화된 처벌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형량 인상이라는 조치가 실제 사기 범죄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질지는 별도의 문제다. 형사사법 현장에서 수많은 사기 사건을 다뤄본 변호사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개정은 분명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중요한 한계도 드러낸다. 무엇보다 형량을 높이는 것만으로 범죄가 감소한 사례는 거의 없다. 사람은 범행을 저지르기 전 형량을 정교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은 '나는 안 잡힐 것'이라는 심리에 기반해 행동한다. 충동적 범행이나 조직적 지시에 따른 범죄에서는 형량 자체가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더 흔하다. 범죄 심리 연 구에서도 ‘처벌의 엄격함(severity)’보다 ‘처벌의 확실성(certainty)’이 행동 억제에 훨씬 강한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해 왔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사기 구조의 특성이다. 최근 캄보디아 등 해외에 본거지를 둔
조진웅 배우가 소년범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마녀사냥과 다름없는 여론 몰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이리도 가혹하고 세상은 왜 이토록 냉정한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는 1992년 1월 당시 천안소년교도소(현재는 ‘천안교도소’)에 9급 교도관으로 임용되면서 교도관 생활을 시작해, 30년 중 17년을 소년수용자들과 함께 보냈다. 소년교도소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소년수들의 상처받고 비뚤어진 마음을 다독였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성직자들은 신앙을 바탕으로 교화·개선을 도모하고, 심리치료·음악치료·미술치료 전문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소년수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교정기관에서도 수용자들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이러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당시 천안교도소에는 지역 대학교의 교수 한 분이 매주 교도소를 방문해 소년수들의 연극 지도를 하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성껏 연극반 수용자들을 지도해 천안시민회관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연극을 통해 소년 수용자들의 마음을 치료했던 조동희 교수님의 이야기다. 그의 소탈한 성격과 인자한 웃음을 통해 많은 소년수들이 새
성범죄 피의자로 입건되는 순간 사람들은 흔히 상상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억울하다는 마음이 앞서기도 하고 ‘수사에 성실히 임하면 진실이 드러나겠지’ 하는 기대를 품기도 하지만, 현실의 수사·재판 절차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성범죄 사건은 특성상 직접증거가 많지 않고, 결국 피해자와 피의자의 진술이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에 ‘초기 대응’이 사건의 향방을 거의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조사는 특히 중요하다. 수사기관이 처음 작성하는 피의자 진술조서는 이후 모든 판단의 기준점이 된다. 이때 피의자는 종종 ‘솔직하게 말하면 오해가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며 준비 없이 진술에 나서곤 한다. 그러나 수사 기록에 남는 문장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항상 존재한다. 말의 앞뒤가 잘려 기록되기도 하고, 표현이 과장되거나 부정확하게 기재되기도 한다. 이후 진술을 ‘수정’하게 되면 진술 자체의 신빙성이 흔들려 불리함이 커진다. 따라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추측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당시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떠올려 정리한 뒤 조사에 응하는 편이 안전하다. 수사기관에서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비칠
성범죄 사건에서 합의는 가해자에게는 형사처벌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되고, 피해자에게는 실질적인 회복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격적 침해를 금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의금은 늘 논란과 갈등을 낳는다. “얼마가 적정한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 합의는 ‘형법’ 제51조의 ‘범행 후 정황’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감경 요소로 평가된다. 특히 처벌불원 의사가 포함된 합의는 양형기준상 특별감경 사유로 작용하여 실형과 집행유예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대구고등법원 2018. 9. 20. 선고 2018노242 판결)(서울북부지방법원 2019. 1. 11. 선고 2018고합383 판결). 다만 법원은 합의서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합의가 어떤 과정에서 이루어졌는지, 합의금이 범죄의 중대성에 비추어 적절한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 세심하게 따진다. 미성년자나 장애인처럼 취약한 피해자와의 합의라면 그 진정성을 더욱 엄격히 심사하는 것이 최근 판례의 흐름이다(대구고등법원 2018. 9. 20. 선고 2018노242 판결). 반대로, 겉으로는 합의가 이루어졌더라도 강압적 분위기에서 합의서가 작성되었거
범죄에 연루된 이들 가운데 자신이 단순 가담자라고 생각했음에도 재판에서 공동정범으로 인정되면서 예상보다 훨씬 큰 추징금을 선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실제로 손에 쥔 이익이 거의 없는데도 공동정범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체 범죄수익의 일정 부분을 부담하게 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출소 이후 생계 유지 자체가 가능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번 칼럼은 이러한 문제를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실제 집행에서 어떤 완충 장치가 있으며, 출소자가 어떤 사회복귀 전략을 취할 수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형법 제30조는 2인 이상이 ‘공모’하여 각자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적 행위 지배’가 있을 경우 공동정범으로 규정한다. 판례는 여기에 더해 범행 수행 과정에서 본질적 기여를 한다는 인식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정범 책임을 인정해 왔다. 도박장 딜러·현금 수거책·계좌 제공자 등이 공동정범으로 판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넓은 공동정범 인정은 범죄 조직의 분업 구조 속에서 ‘말단’ 역할이라 해도 전체 범행 실현에 필수적이라면 동일한 책임을 묻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공동정범 성립에는 치밀한 공모가 필수적이지 않다. 순차적·암묵적으로 의사가 상통한 경우에도 공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