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부모님이 트럭으로 자영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달리던 녀석은 올해 들어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해, 어느덧 앞에 달린 수리비만 1,000만 원 가까이 됐다. 여기에 트럭 할부금과 기름값, 생활비까지 매달 나가야 할 돈이 쌓여 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은 몇 날 며칠 끙끙 앓다가 나와 누나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빠듯한 적이 없었는데… 다음 달에 쓸 돈이 부족해 대출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는 이보다 더한 일도 수없이 겪어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웃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부모님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다 내 통장이 떠올랐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매달 차곡차곡 모은 주택청약예금과 자율 적금이었다. 그 돈이면 당장 수리비와 생활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었다. 적금을 깨자는 내 말에 부모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막내아들이 꼬박꼬박 모은 돈을 쓴다는 게 편치 않은 것이다. 주저하는 부모님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이럴 때 쓰려고 모아 둔 거지. 대출 갚겠다고 대출을 또 받으면 더 고생이잖아. 더 빌리지 말고 내 돈 써.” 부모님은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하셨다.
“자녀들은 때로 부모가 자식들을 아끼는 것보다 부모를 더욱 사랑한다.” 오래전에 아동심리 전문가에게서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구치소라는 낯선 환경에 들어오기 전에 평범한 사회인으로, 또 한 가정의 아버지로 지냈을 때, 가끔가다 어린 두 아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지을 때면 그 얘기가 종종 떠오르곤 했습니다. 작년에 다른 구치소에서 지낼 때 ‘가족 만남의 집 접견’을 했습니다. ‘장소 외 접견’이라고 불리는데, 접견 시간이 더 길고 가정의 거실 같은 분위기로 꾸며진 방에서 만나 손도 잡고 포옹도 할 수 있는 보다 따뜻한 접견 방식입니다. 몇십 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곧 헤어질 시간이 되어 아쉬움이 묻어나는 포옹을 하며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습니다. 접견하는 내내 두 아들과 저는 명랑한 표정과 말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된 두 아들과 아내는 집으로 돌아갔고, 며칠 후 아내와 통화를 했습니다. 예상 밖에 아내가 한 말이 저의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차 안에서 울었고 또 집에 도착해서도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접견할 때 저에게 궁금한 표정으로, 제가 입
엄마, 하고 마음을 담아 목청껏 불러봅니다.엄마, 제 목소리 지금 들리시나요. 유행가처럼 늘 부르던 엄마. 배고플 때 밥 달라고 “엄마”하고 부르고학교 갈 때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집에 오면 “엄마, 다녀왔습니다”내가 아쉬울 때 애교 부리면서 “엄마” 60년을 넘게 입에 달고 부르던 나의 노래 “엄마”지금은 부를 수가 없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지요. 내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는 태내에서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언어를 배웠고,세상의 빛을 보면서는 엄마는 나에게 젖가슴을 내밀어 초유를 주시며,엄마와 나의 첫 인연을 가족의 끈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엄마가 숨을 쉬면 내가 숨 쉬는 것이고,엄마가 웃고 있으면 내가 웃고 있고...그런데 왜 엄마의 아픔과 슬픔은 대신하지 못할까? 참 아쉽다. 이제는 우리 엄마가 늙어가는 모습만 바라보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돌이켜봅니다. 엄마에 대한 감사, 사랑, 배려 이런 단어들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는 못할 것입니다.이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지나면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뒤에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영원히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엄마의 은
미움과 귀여움의 차이 아무 데서나 방귀 뀌기, 반찬 많이 먹기, 화장실 나오면서 슬리퍼 아무 데나 벗어 던지기, 3옥타브로 코 골기 등등. 같이 지내는 어떤 인간의 만행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이런 인간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내 수명을 갉아먹는 건지, 하… 그래 이것이 감옥이지, 이 또한 치러야 할 내 죗값에 패키지로 포함된 것이라 여기며 매일을 정신승리 갱신을 하던 10여 년 전이 떠오른다. 사람이 싫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밉게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매 순간 인상을 쓰고 다니는 그 사람의 면상이었다. 저 양반 왜 저래? 뭘 잘했다고 저렇게 인상을 구기고 다녀? 쎄보이려고 저러나? 별생각 다하며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커져 갈 무렵, 어느 날 접견장 대기실에서 그 인간과 딱 마주친 것이다. 서로가 비호감임을 인지해 온 시간의 무게만큼 대기실의 적막감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000번, 스마트 2호 접견실로 들어가세요.” 구세주 같은 직원의 방송이 나오자, 그 사람이 먼저 접견실로 향했다. 잠시 후, “하하하, 우웅~ 구래구래~ 우리 딸내미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쪘져?” 접견실 문 너머로 그 사람의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교도소, 구치소에서 자유가 제한된 힘든 생활을 보냅니다. 지난번 <더시사법률>에 투고했던 투고자님의 말씀처럼 구치소든 교도소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돈(영치금)이 없으면 ‘법자’(법무부 자식)라는 은어로 불리며 거실 내 소일거리를 맡아서 하거나 식기 당번제, 화장실 청소와 같이 번갈아 가며 해야 될 일도 도맡아 하게 되는 경우가, 저의 주관으로는 거의 모든 교정시설이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자인 저도 ‘법자’입니다. 미결수를 지내는 동안 영치금이 없고 접견 오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거실을 쓸고 닦고, 화장실 청소, 설거지, 식수 받기, 구매지 작성을 다 했습니다. 20시 30분에 모포를 깔면 그대로 잠들었고, 오전 5시 30분이 기상 시간이었습니다. 영치금이 어느 정도 있어야 징역 생활이 편하다는 것에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 같은 경우 괴롭힘이 심해서, 주로 괴롭힘을 주도했던 인원이 전방을 가고도 쓰리쿠션(타교도소에 편지를 적어 원하는 교도소로 편지를 보내는 행위)으로 저를 괴롭히라고 하는 정도까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차피 이런 일로 면담을 해봐야 좁은 징역에서 코걸이라며 더욱이 사람 취급을 못 받을 것이
언니, 잘 지내고 있어요? 작년 10월에 언니가 집행유예로 나가셨으니까 8개월이 지났네요. 그때 막내딸이 임신 중이라 혹 실형을 받고 기결수가 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하셨는데 지금은 손자 품에 안고 함박웃음 지으며 살고 있겠네요. 언니가 선고 며칠 앞두고 나한테 그러셨지요? 뜬금없이 “도와줘서 고마웠다”고… 나는 언니를 도와준 게 없는데 언니가 그러기에 그냥 인사치레로 받았었지요. 작년 여름은 정말 ‘살인 더위’라는 말을 실감했었잖아요. 더위 타는 언니가 너무 힘들어해서 나는 언니의 빨래를 해주었었고 사물함도 심심하면 정리를 했잖아요. 솔직히 언니를 도와준다는 배려심보다는 내 성격상 주위가 어지러운 걸 못 보고 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언니에게 잔소리를 하느니 내가 했던 건데 언니는 불쾌해 하거나 짜증을 내기보다는 오히려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많이 편했답니다. “고마웠다”라는 인사는 언니가 아니라 내 쪽입니다. 언니는 수감생활하면서 남에게 많이 베푸셨고, 어린애들이 거실에서 엉뚱한 짓을 할 때는 가차 없이 훈계도 했었지요. 어떤 애들은 반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난 언니의 그런 모습을 내심 맘에 들어 했었습니다. 언니가 집행유예로 가족 품으로 가셨을 때는
2013년 11월 6일, 이 세상에 내 눈을 쏙 빼닮은 딸아이 두 녀석이 태어났다. 이란성 쌍둥이… 볼을 비벼보고, 살짝 꼬집어 보고, 내 배에 올려놔 보고, 두 팔로 안아보고, 앞뒤로 업어 보고, 밤새 우는 아이를 재워보고, 우유를 먹여보고, 내 쭈쭈도 물려보고… 혹여 닳을까, 혹여 떨어질라, 땅에 내려놓는 것도 아까워… 어쩜 이렇게도 예쁠까? 어쩜 이렇게도 귀여울까? 이토록 아름다운 인형을 내가 만들었다고? “아빠~” 오메, 아빠라고 했다. “여보~ 방금 아빠라고 했어." “아빠~ 아빠~” 내가 만든 인형이 이제 말도 한다. 내게 아빠라고 하는데? 분명 아빠라고 했는데… 그래, 내가 너희 아빠다. 내가 창조주다. 내가 너희 둘을 한방에 만들어낸 창조주다. 기어다니던 녀석들이 아장아장 걷는다. “오~ 걷는다. 걷는다.” “여보! 봤어? 걷는 거?” 아빠도 그때가… 아장아장 걷던 그때가 그립다.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살던 그때가… 너무도 그립다. 할머니 품에서 엉엉 울었던 그때가… 밥상 머리 파리채를 움켜쥐고 밥을 떠먹이는 전투적이던 할머니… 이제 그 추억 비슷한 것을 돌아보며 내 딸아이를 마주하면서, 그때… 그 기억을 떠올린다. 나도 너희들처럼
술, 단합과 화목을 이끄는 리더 술, 어둠의 길을 안내하는 사신 술, 슬픔을 잊게 하고 희망을 주는 달콤한 사탕 술, 주위에 피해를 주고 나락으로 이끄는 악마 술, 아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꿈나라로 이끄는 몽마 술, 돈을 잃게 하고 건강을 악화시키는 병원균 술, 정신과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진정제 술, 정신과 몸을 중독시키는 마약
한 줌의 흙밖에 남지 않는 인생인 걸 왜 이리도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하는지. 죄를 짓고도 주위 사람을 헐뜯고 욕하고 아등바등하며 상처만 남기는 것이 인생살이인가. 백 년 살기도 힘든 세상만사, 죄만 짓는구나.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너무 빡세게 살지 말고 이놈의 세상살이 이렇게도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왔구나. 이것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후회하며 그렇게 살 것 같구나. 인생살이, 아무리 뒤집으려 해도 아무리 바꾸려 해도 욕심만큼은 버리지 못하니 그래서 욕심이 죄를 지어 깊은 수렁에 헤어나지 못한 삶이다. 어찌할까 생각에 묵상에 지난날의 반성에 나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싶을 때이다. 이곳에서 오 개월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심술이 나는구나. 좀 더 시간을 보내며 반성과 침묵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고 싶을 때이다. 더 깊은 반성으로 좋은 앞날을 꿈꾸며 하루를 헛되지 않게 계획성 있게 살 것이다.
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꽃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白合)의 골짜기를 지나, 푸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새들같이 봄이니까 마음 가는 대로 00이 생각하면서 펜 가는 대로 써 본다. ○○이 여행 좋아하잖아! 특히 부산. 가고 싶다고 했지! 오빠가 나가면 부산 가자. 바다 보러 가자. 우리 ○○이 노래 듣고 싶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