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선은 무죄, 말단은 유죄?…“자기 사건은 면책” 증거인멸죄의 ‘모순’

증거인멸, ‘타인의 형사사건’만 처벌
전문가 “방어권 남용 규제해야” 성토

타인의 형사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인멸할 경우 처벌되지만, 본인의 형사사건에 대한 증거를 직접 인멸한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는 현행 형법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방어권 남용을 규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형법 제155조에 따른 증거인멸죄의 적용 범위는 ‘타인의 형사사건’으로 제한돼 있다. 이로 인해 증거인멸 행위가 있었음에도 실질적 책임자가 처벌을 면하고, 하급자나 지시를 받은 제3자만 형사 책임을 지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가 주도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다. 이 사건을 폭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관련 자료를 삭제했지만, 정작 상사였던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장 전 주무관에 대해 “위법한 지시를 따르지 말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진 전 과장에 대해서는 “자신의 형사사건에서 향후 수사를 우려해 자료를 삭제한 것”이라며 ‘정당한 방어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증거인멸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본인의 사건에 증거인멸죄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피의자나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취지에서 비롯됐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책임 전가나 처벌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자신의 범죄 은폐를 위한 조직적 증거조작조차 방어권 행사로 인정받는 경우가 생기며, 기업 비리 사건이나 공직자 비리 사건처럼 조직적인 증거인멸이 빈번히 발생하는 경우 결국 말단 직원만 유죄를 받고 윗선은 법망을 빠져나가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타인에게 증거인멸을 시킨 경우 ‘증거인멸 교사’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대법원은 “단순한 도움 요청만으로는 교사범 성립을 인정할 수 없으며, 구체적이고 강제적인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판례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처벌되는 사례는 드물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최소한 교사범의 처벌 요건을 완화하거나, 일정한 경우에는 자기 사건이라도 증거인멸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특히 가족이나 지인에게 지시하여 증거를 없앤 경우, 실제로는 조직적인 은폐 시도가 있었음에도 법리적으로는 처벌이 어려운 상황에 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법무법인 민 윤수복 변호사는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자가면책을 허용하는 현재의 형법 조항은 근본적인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며 “실무에서 반복되는 피해와 책임 전가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증거인멸죄의 적용 범위에 대한 법 개정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