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요새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 안에서 7년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을 보살펴 주시고, 남들과 조금 다른 부분도 이해해 주시고 용기 낼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끈끈한 가족의 정만으로도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잖아요. 돈이 없어도 서로를 보며 웃었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챙겨주고 함께 이겨냈던 기억들이 전 참 좋았어요. 그래서 전 가난하다는 건 결코 불쌍한 게 아니라는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없는 살림에도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도 하셨었죠. 제게 그런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셔서 저도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참으로 감사드려요, 엄마. 지금까지 제가 해드린 건 사랑한다는 말뿐이지만, 이곳을 나가면 꼭 효도할게요. 평생 가족 여행 한번 못 갔는데 꼭 가요, 엄마. 영원히, 언제나 엄마의 편인 아들 올림
저는 2023년 11월 15일에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 생활을 하고 있는 수용자입니다. 벌금형을 함께 선고받은 상태이기에 현재는 노역방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와 같이 생활하고 있는 수용자 형님께 큰일이 있었습니다. 형님은 뇌전증 환자이면서 장애가 있으신 분이라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평소 저는 형님이 식사를 하실 수 있게 죽, 밥, 반찬 등을 떠드리고, 이가 없는 형님께서 식사를 천천히 마칠 수 있도록 옆에서 하나하나 챙겨드렸습니다. 형님의 식기 처리 당번 순서가 돌아오면 제가 대신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형님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수용 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들기 전 형님이 저에게 머리가 아프다며 두통약을 하나 달라고 해 드신 상태였습니다.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는데, 형님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무너지는 형님의 몸을 받아냈습니다. 갑작스러운 뇌전증 발작이었습니다. 형님의 눈이 뒤로 돌아가더니 곧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저는 형님을 모포 위에 똑바로 눕히고 기도를 확보한 후 전신을 주무르면서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는 등 응급처치를 했고, 이와 동시에 비
안녕하세요. 저는 1년 3개월간의 긴 재판 끝에 10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아 남은 20대를 교정 시설에서 보내게 된 20대 중반 수형자입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삶을 비관하여 포기하려 하는 이에게 제 사연을 전합니다. 저는 유아기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정서적 불안과 슬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대로 돌봄 받 지 못한 채 몸만 커져버렸고, 보호받고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가족들은 제게 한 번도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들은 많아지고 가정불화에서 벗어나긴 좀처럼 쉽지 않아 매일이 지옥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가 다치는 소동이 날이 갈수록 잦아졌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는 걸 볼 때마다 치가 떨렸습니다. 가족 때문에 끌려다니는 시간이 많아져 학업도, 직장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었고 문득 ‘이러다가 서른이 넘어도 못 벗어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자 무력감과 비참함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느 날 팔과 다리를 비롯해 어머니의 온몸에 멍이 든 걸 보고 잘 참고 견뎌왔던 마음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결국 제 생일 전날 회사 승진을 앞둔 술자리에서 잔뜩 취한 채로 귀가해 아버지를 해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변
To. 사랑하는 나의 아내 흔한 안부조차, 인사조차 당신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건네기가 미안한 마음이야. 부부란 평생 의지하고 감싸줘야 하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너무나 큰 짐을 떠안기고 온 것 같아서 죄스럽기만 해. 2024년 당신은 혈액암이라는 큰 병을 진단받고 혹여나 나에게 짐이 될까 봐 숨기고 있었지. 많이 수척해진 모습에도 그냥 몸이 좋지 않은 것이려니 하고 무심코 넘겨버린 나 자신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어. 내가 갑자기 구속된 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아픈 몸을 이끌고 피해자들을 만나 합의하기 위해 분 주하게 뛰어다니던 당신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은 형기를 교도소에서 버텨보겠다는 말을 내가 꺼냈을 때 당신은 단호한 눈빛으로 그것만은 안 된다고 했지. 나는 그 순간에도 가장답지 못했고, 남편답지 못했어. 어느 날 접견을 와서 해맑은 미소로 “여보, 전에 일하던 식당에서 다시 일하라고 했어”라며 나에게 맛있는 걸 많이 사주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당시에는 당신 마음 아플까봐 애써 미소만 지었지만 거실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어. 여보! 나는 수용
친구에게 친구야, 우리 오랜 친구로 남아있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인생이다. 지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친구로 남아있자. 가까이서 살지 못하더라도 일이 있을 때 한달음에 달려와 주는, 허물없이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친구로 남아있자! 우리가 함께한 추억이 세상 사는 고단함에 옅어질지라도 서로 만나면 밤늦도록 옛 추억을 나누며 진한 향기를 풍기는 라일락 같은 친구로 남아있자! 어찌 친구라고 해서 늘 한결같을 수 있으며 늘 곁에 있을 수 있겠냐마는, 서로 칭찬하며 성장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너그러운 인품을 지니고 진실한 친구로 남아 있자! 우리 어떤 모습이든 자랑스럽고 떳떳한 친구로, 어떤 상황에서든 격려할 수 있는 친구로 남아 서로를 비추는 등불이 되자! 혹여나 세월의 풍파 속에서 연이 끊겨 볼 수 없게 되더라도, 아련히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친구로 남아 있자! 우리가 재회하려면 아직도 건너야 할 세월이 12년이나 남아있지만, 난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친구야, 보고 싶고 사랑한다!
2024년 10월 13일 교도소 수감 중 근무자로부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며칠을 넋 나간 사람처럼 지낸 나는 내 모습을 보며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 난다’ 그렇 게 믿으며 단순하게 살아왔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생각이 달라졌다. 사람은 죽어도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내 기억 속에, 내 가슴속에 살아계신다. 가족들은 아버지 무덤 앞에 가서 울며 그리워했다고 했다. 만약 내가 죽으면 누가 있어 내 무덤 앞에서 울어주고, 슬퍼해 주지? 생각나는 건 연로하신 어머니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슬픈 일이다. 과연 내가 죽고나면 내 무덤 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절로 들었다. 전처럼 살다가 친구처럼, 지인처럼 마약 과다 복용으로 심장 쇼크가 와서 사망한다면 나는 어찌 될까?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 한 명 없이 홀로 외로이 그리움과 고독에 지쳐 쓰러져 있겠지. 지금의 현실이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다. 그때의 삶은 사람이 사는 삶이 아니었다. 마약의 노예…. 보통 사람의 삶은 기대할 수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시간과 세월
To. 내 동생 지니 안녕하세요. 늘 신문을 구독만 하다가 오늘은 용기 내어 편지를 써봅니다. 저와 제 여동생은 두 살 터울입니다. 동생이 늘 제게 없어지지만 말아달라고 했는데, 울면서 저를 만류했는데 끝내 저는 범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그리움과 미안함을 동생에게 전할 방법이 없어 이렇게 편지로나마 제 진심을 담아봅니다. 네 얼굴을 보지 못한 지도 어느새 2년 가까이 흘렀어. 내가 구속된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기간이 정확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치? 평생 10대일 것만 같았던 우리가 벌써 20대의 끝자락에 서있네. 나는 지난 9월에 생일이 지나서 이제 30대에 진입하게 되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어떤 변화들이 네 삶에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지만 내가 무슨 염치로 너에게 먼저 연락 하겠어? 곁에서 그저 없어지지만 말아달라는 너의 부탁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오빠일 뿐인데. 서울에서 함께 자취하며 공부하고, 둘이서 해외여행도 다니고. 평범한 남매라고 하기에 우린 참 사이가 좋았는데 말이야. 이제 9개월 후면 나는 이곳을 나가 사회로 복귀하게 될 거야. 너의 가장 찬란했을 시기를 함께해
To. 나의 하나뿐인 와이프 황공주에게 안녕하십니까. 평소 <더시사법률>의 품36.5 코너를 즐겨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아왔습니다. 최근 비슷한 사연을 읽다가 용기를 얻어, 저 또한 마음을 담아 편지 형식으로 글을 보내봅니다. 저는 최근 수원구치소에서 3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행유예로 출소한 지 이틀째 되는 사람입니다. 같은 구치소에서 생활하던,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먼저 두고 나오니 마음이 편치 않아 이 글을 통해 제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To. 나의 전부에게 애기야, 널 위해서라면 오빠가 못 할 게 없다 는걸 이번에 더 느꼈어. 처음 겪는 수감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더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어. 이 코너를 통해 이 편지가 너에게 닿기를,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게. 너에게 이 편지가 감동과,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 좋은 말 한마디를 마음에 담고 하루를 보내면 시간이 조금은 빨리 가는 것 같더라. 그걸 내가 느껴봤기 때문에 이렇게 너에게도 전하고 싶어. 오빠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매일매일 바라면서 지냈고, 너도 오빠가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기를
“잠은 무덤에서 자고, 살아있을 땐 잠자는 시간을 아껴 자기계발서를 읽어라.” 10년 전, 어느 버스 정류소 광고판에서 이런 멋진 글귀를 읽은 후 난 그날부터 자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며 독서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시력이 나빠져 책과 이별을 했다. 4개월 전부터 구치소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책과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곳에선 대부분 만화책이나 추리소설 등을 읽는다. 나의 독서 성향과는완전히 다른 코드의 책들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베스트셀러 등을 좋아한다. 학창 시절 내 성적은 항상 중간이었다. 지금 드는 생각은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해볼걸’ 하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보니 책 읽는 게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9시면 자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난 항상 12시까지는 책과의 데이트를 한다. 낮에도 3시간 정도는 독서에 매진한다. 같은 방에 있는 28세의 딸 같은 아이도 나를 따라 책을 읽으면서 좋은 내용에는 형광펜으로 밑줄도 긋고, 노트에 메모도 남긴다. 그러다 기억에 남는 좋은 내용이 있으면 서로 공유하면서 웃기도 한다. 64세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독서가 최고의 공부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치열하게 보냈던 지난 나날은 쉽지 않
안녕하세요. 저는 경북북부제1교도소 재소자입니다. 오늘은 10월 마지막 금요일에 있었던 훈훈한 이야기를 전해보려 합니다. 이곳에는 모두가 죄를 짓고 들어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안에서 승급을 목표로 하고 있고, 누군가는 직업훈련에 매진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별 생각 없이 시간만 때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모두 같습니다. 사회로의 복귀. 이 안의 모두는 자유를 갈망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저 자신과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하루에 20분간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뛰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에 허리를 삐끗해 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추위가 몰려드니 운동장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운동 시간이 끝나고 다시 방에 돌아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돌연 수용자 한 분이 쓰러지셨습니다. 그 순간 미장, 타일 훈련생들이 일사불란하게 누울 자리를 만들더니 CPR을 했습니다. 환자의 신발을 벗겨 양발을 주무르고, 근무자님은 응급벨을 치고 달려오셨습니다. 저는 무슨 ‘어벤저스’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직후 CRPT와 관구 계장님들, 의무과 직원들까지 정말 5분도 안 되어 모두 달려와 응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