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사 응급환자 발생! 의료과로 이동 중!” 다급한 무전 소리에 나는 한달음에 의료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수용자 L이 피투성이가 된 발뒤꿈치를 붙잡고 누워있었다. 아킬레스건을 끊으려고 한 모양이다. 수용자 L은 교도소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다. 젊을 땐 정보공개 청구와 인권위 진정으로 직원들과 부딪혔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자 더 이상 그의 행동에 반응해 주는 이도 드물었다. 특히나 L이 수용되어 있는 교도소에 사형수와 무기수, 거물급 수용자들이 많아 그의 존재감은 점점 묻혀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벌인 소동도 관심을 끌어보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타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 친구가 내게 그의 과거사를 전달하며 신경 좀 써달라 부탁해왔다. 교도소에서 나이가 들어버린 L은 가족도 없고 건강도 나빠져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파손된 안경으로 인해 가까이하던 신문과 성경조차 읽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수용자 L이 결국 선택한 건 자해였다. 그가 선택한 자해라는 방식은 오히려 모든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앞으로도 긴 시간을
2018년 검경 수사권 조정 이야기가 세상 떠들썩할 때 이야기다. 상담을 하고 싶다는 한 의뢰인이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의뢰인 A씨는 00경찰서 수사관 B의 수사로 이미 한 차례 구속되었던 A씨는 출소한 지 3주 만에, 다시 같은 수사관 B로부터 또 다른 사건으로 소환장을 받았다고 했다. “변호사님, 그 수사관한테는 더 이상 수사를 못 받겠어요. 사건을 제가 등록된 주소지로 이송하거나 수사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어요.” 처음엔 간단한 행정적인 요청으로 보였다. 사건 이송 신청서나 수사관 교체 요청서를 작성해서 접수하면 될 것 같았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A씨가 연루된 사건은 흔히 “작업 대출”로 불리는 유형의 사건이었다. 이는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을 연결해 서로 맞보증을 서게 한 뒤, 대출금을 받아 나눠 갖고 함께 갚아나가는 구조였다. A씨는 이 과정에서 중개 역할을 하며 두 명의 명의자에게 총 300만 원을 대출받게 하고, 그 대가로 A씨는 30만 원의 중개 수수료를 받았다. 이런 사건의 본질은 대출자가 피해자가 아니라 금융사가 피해자인 사건에 해당하는데 문제는 맞보증을 섰던 명의자 중 한 명이 대출금을 갚지 않
1997년부터 형사 C는 3년 넘게 청와대 내부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장신의 키와 수려한 외모로 청와대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당시 인기 많았던 홍콩 영화배우 곽부성과 유덕화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겉보기에 멋져 보이는 VIP 경호 업무엔 항상 극도의 긴장감과 체력 소모가 뒤따랐다. VIP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그는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2001년, 형사 C는 청와대를 떠나 서울 서초경찰서 형사로 자리를 옮겼다. 경호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이다. 사실 형사라는 직업을 어린 시절 꿈꿨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우연한 기회로 형사가 되었을 뿐인 그였지만 형사가 되어 사건 현장에 출동하고 수사를 진행하며 경호업무와는 다른 일에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2010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한 사건이 서울 잠원동 한강변의 한 도로에서 발생했다. 예기치 않은 살인사건이었다. 2010년 12월 5일 늦은 밤, 친구와 헤어진 A 씨(남성, 20대 중반)는 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밤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밤이 늦었지만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던 A 씨는 버스비라도 아껴볼까 싶어 집
“변호사님 저희 남편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지인의 소개로 연락했다는 한 아주머니였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아주머니의 너무나 간절한 목소리에서 그냥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제 남편이 00시 연꽃단지 조성 지자체 보조금 편취로 검찰에 구속됐어요.” 당시 관리가 허술해 보이는 지자체 보조금을 흔히 ‘눈먼 돈’이라고 부르며 허위 영수증을 첨부해 보조금을 부정하게 타가는 사례가 있었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불거지며 대대적인 감사가 있던 때였다. 이 사건은 언론보도가 이미 많이 되어 있었다. 바로 ‘지자체 보조금 편취사건’이었다. 법조계에선 흔히들 이런 사건을 ‘언론 탄 사건’이라 부른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건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다양한 언론 채널에서 보도되며 아직 혐의가 입증이 되지 않았고 재판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당사자가 유죄인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개인적으로 업무적인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 선임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절실함이 마음에 걸려 일단 남편부터 접견해보기로 했다. 성실하고 순박한 농민으로 보였다. 대체 이 사람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처음에 저는 연꽃단지
「쇼생크탈출」의 첫 장면은 20년간 수감된 레드(모건 프리먼 분)가 가석방 심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레드는 가석방 위원들 앞에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더이상 이 사회에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에게 맹세합니다”라면서 간절히 가석방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기각’입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레드는 또다시 가석방 심사를 받고 10년 전과 똑같은 말을 하지만 결과는 또 ‘기각’입니다. 또다시 10년이 더 지난 뒤 이제 수감생활 40년 차인 레드는 가석방 심사에서 교화되었느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냉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한다. “교화? 헛소리야! 그것은 정치인들이 꾸며낸 말이야. 당신 같은 젊은이가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낸 말이지. 죄를 뉘우쳤냐고?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소. 옛날의 젊은 나를 만나서 지금의 현실을 말해주며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러나 그 젊은 녀석은 오래전 사라지고, 이 늙은 놈만 남았어. 어서 부적격 도장이나 찍고 내 시간을 그만 뺏어.” 그런데 이번에는 가석방이 승인된다. 레드가 가석방을 간절히 원할 때는 ‘기각’되다가 가석방을 체념했을 때 비로소 ‘승인’되는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변호사님, 경찰 출신이시죠?” 상대는 수사를 받고 있다며 담당 수사관이 경찰대 출신이라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요컨대, 인맥을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같은 경찰대 출신이라도 혐의가 확실한 사건은 봐줄 수 없습니다. 그런 기대라면 선임할 필요 없어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보통 의뢰인들은 경찰 출신, 전관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사건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은 경찰대 3년 후배였다. 매년 정기모임에서 만나는 사이였고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후배 관계가 있다고 해서 사건이 잘 마무리되거나 혐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내 경험상, 경찰, 전관출신 변호사는 그해당 직무를 수행해 봤기에 수사기관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어떻게 싸우려는지, 그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의뢰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흐름을 대처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약속을 잡고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은 두 명, A와 B였다. 사건 내용은 차깡 범죄였다. 신용이 좋은 사람의 이름으로 무담보 대출을 받아 신차를 구입한 뒤, 바로 중고차
12월 7일 오전 10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들께 불안과 불편을 끼쳐드려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많이 놀라셨을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자신의 임기를 포함한 정국 안정 방안을 여당에 일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에 대한 진정한 사과보다는 야당에 대한 분노와 12월 7일 오후 5시 본회의 김 여사 특검,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과 검찰 간의 대립, 여당의 독주로 인해 국민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었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서 정부와 맞서며 주목받았고 국민들은 변화와 견제를 기대하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취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의 중심에 선 윤 대통령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야당 의원들에 대한 수사에 집중하며 또 다시 정치적 대립 구도를 이어갔다. 과거 여당의 독주에 실망했던 국민들이 변화를 기대하며 선택한 정권이지만, 윤 대통령의 행보에 실망한 지지층들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에 머물며 좀처럼 반등의 기회를 찾지 못하고 12월 4일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