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써본다. 10여 년 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조그맣고 나를 닮은 너를 두고 난 무책임하게 집을 나와버렸지. 본래 1년의 별거를 약속했지만, 세월은 기약 없이 10년이나 흘러버렸다. 달력을 헤아려 보니 벌써 너는 성인이 된 지 한참이더구나. 이곳에 와서 네 또래 정도 되는 사람들을 보면 왜 이리 마음이 가는지…. 은연중에 나는 너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밖에 있을 땐 뭔가 준비가 되어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은 벌써 다른 가정을 꾸렸는데 내가 나타나면 마음의 상처를 후벼파는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있었지. 또 지금의 내 초라한 행색으로 인해 서로 마음만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젠 모든 걱정을 다 걷어버리고 서로 눈을 마주한 채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들, 나 또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단다. 내성적으로 자란 탓에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혼란을 많이 겪었어. 그런 전철을 밟아보았기에 이혼만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혼자만의 다짐으로 되는 것은 아니더구나. 훗날 아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물론 너는 나를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래도 가슴
함께 수감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접견실 유리 너머로 내 모습을 보며 펑펑 울더라고….” 하는 짠한 경험담이 그것이다. 사회에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교정시설에 들어간 것이 그만큼 큰 비극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리라. 하긴, 어찌 보면 사는 동안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비극 중 죽음 다음으로 큰 비극이라는 생각도 든다. 교정시설에 있는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하루는 의료과에 가려고 나왔는데, 이미 같은 사동의 다른 재소자 한 분이 먼저 나와 계셨다. 덥수룩한 수염, 불안한 눈빛.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냐고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공황장애와 조현병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셨다. 나 또한 양극성정동장애와 공황장애로 긴 시간 고생을 한 적이 있는 터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쓰여 의료과에 다녀오는 내내 챙겨 주게 됐다. 거실로 돌아가던 중 문득 나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마음가짐이 떠올라 한마디 건네 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운을 뗐다. “…○○씨, 생각을 바꾸면 좀 괜찮아져요. 잘 생각해 봐요. 여기 생활이 뭣 같고, 오고 싶어서 온 곳은
안녕하세요. 저는 울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용자입니다. 창간 이후부터 꾸준히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열혈 독자입니다. 유익한 정보도 많고, 늘 수용자 입장을 대변해 주셔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를 살려주신 교도관님 한 분께 감사함을 표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2025년 6월에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하고 있고, 현재 자살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중점 관리 대상자입니다. 도박 중독으로 가족을 잃고, 제 인생도 송두리째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경주교도소에 있을 당시 수면제를 털어 넣고 극단적 시도를 했습니다. 당시 제 상태는 위급했기에 근처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변함없는 자신을 보면 화가 나고, 자괴감에 빠져 비관적인 생각들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만난 함수호 계장님은 그런 제게 은인이 되어주셨습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시면서 힘들 때마다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계장님은 저뿐만 아니라 고민이 있는 수용자들이 있으면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 주시고, 항상 수용자 편에 서서 도와주십니다. 관구 팀장님이라 항상 바쁘신데도 도움을 요청하면 제
제 나이 어느덧 오십 줄입니다. 남들은 일궈놓은 삶을 갈무리할 나이라는데 저는 여태 철없던 시절에 멈춰버린 머릿속 시계를 탓하며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천덕꾸러기였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세상에 대한 원망만 손에 움켜쥔 채 비겁하게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매번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술의 노예가 되어 남의 소중한 재물을 파손하고, 고작 얼마 안 되는 돈에 제 인생을 통째로 맞바꾸는 짓을 반복했습니다. 삶이 힘들다는 핑계로 마신 술이 제 영혼을 갉아먹는 동안 저 때문에 눈물 흘리고 상처 입었을 피해자들의 마음은 단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벌써 전과가 열 번을 넘어갑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담장 안팎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저 자신이 이제는 무섭기까지 합니다. 가족과 연을 끊은 지도 11년, 이제 제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텅 빈 운동장에서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이 처절한 외로움마저도, 실은 제가 뿌린 씨앗이 거둔 당연한 결과임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낍니다. 염치없게도 누군가 제 손을 잡아주길 바라는 과분한 기대를 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망가뜨린 누군가의 일상을 생각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원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 중인 한 수형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학대와 단절된 가족 관계 속에서 저를 찾아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고립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타인과 유대를 맺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이곳에서도 수용자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 같습니다. 불우 수용자를 돕는 제도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저보다 연로하고 힘든 분들이 많다는 생각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혼자 참아왔습니다. 하지만 올겨울의 추위는 유독 시리고 가혹합니다. 생수 한 병 마음 편히 마시지 못하고 제 이름으로 된 이불 한 장 없이 밤마다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할 때면, 육체적인 추위보다 마음의 허기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막막한 마음에 지인의 권유를 떠올려 염치불구하고 더시사법률에 제 사연과 짧은 시 한 편을 보냅니다. 터널의 끝을 기다리며 과거, 나의 잘못으로 갇혀버린 나. 현재, 후회하며 그 무게를 견디는 나. 미래는 여전히 어두운 터널 같아 차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과거의 그릇된 결정이 현재의 불행을 낳았고, 오늘의 초라한 모습에 내일마저 어두워 보이네. 과연 이 긴 터널에도 끝
사는 동안 겪은 수많은 마음의 고통으로 저도 모르게 고난의 길을 참 많이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거친 길 위에서도 늘 귀한 은인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선행을 베풀고도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숭고한 직업들이 참 많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우리 곁의 교정 직원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정부교도소에서 근무하시는 장선숙 교감님께 받은 깊은 은혜에 뒤늦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평소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던 중, 더시사법률의 품36.5˚라는 따뜻한 창구를 통해 큰 용기를 내어 인사를 올립니다. 힘든 직무 속에서도 크고 작은 문제들을 늘 명쾌하고 통쾌하게 해결해 주시고, 무엇보다 사각지대에서 홀로 외로워하는 재소자들에게 조용히 건네주시는 그 따뜻한 관심이 제게는 큰 구원이었습니다. 교감님이 나눠주신 온화한 미소와 눈빛이 그 어떤 거창한 격려나 칭찬보다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아쉽게도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깊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교감님, 이제 저는 스스로 자립하여 반드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올바른 구성원으로 거듭나, 저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봐 주신 교감님의 노고가
마약 판매 혐의로 구속됐을 때, 솔직히 나는 4년 정도 살고 나오지 않을까 낙관했었다. 그런데 법정이 내준 답지는 내 예상보다 두 배나 높은 '8년'이었다. 세상 다 끝난 줄 알고, 여기서 살아서 나가긴 글렀다며 엄살을 떨고 죽네 사네 했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렇게 8년이라는 숫자에 좌절하며 만기 출소 날짜를 통보받은 지 보름이나 됐을까. 옛날에 저지른 일로 추가 건 수사가 개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애꿎은 하늘 탓을 한참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죄는 내가 지었지, 하늘이 지었나.’ 그제야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선처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재판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집행유예 조항이 있었음에도 추가로 1년 2개월이 확정됐다. 내 총 형기는 그렇게 9년 2개월이 됐다. 8년을 선고받았던 날 그토록 절망했던 내가 추가 건 재판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참 간사하게도 ‘제발 8년만 살고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었다. 그 마음의 변화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우습고 씁쓸했다. 지금은 ‘나, 약은 했지만 나약하지는 않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버티는
화면 속 숫자가 오르내리는 것에 내 영혼을 맡겼던 시간, 나는 정작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가치를 잊고 살았습니다. 도박이라는 괴물에 잠식되어 '한 판만 더', '이번만 복구하면'이라는 악마의 유혹같은 계산 속에 나의 미래는 물론, 나를 믿어준 사람들의 신뢰까지 판돈으로 걸고 있었습니다. 내 손가락이 도박판의 버튼을 누르며 일확천금의 신기루를 쫓는 동안 정작 내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삶은 매 순간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정직하게 땀 흘려 일궈온 평범한 일상을, 나는 도박판의 칩으로 바꾸어 허망하게 탕진했습니다. 내가 복구라는 핑계로 화면 속 숫자에 매달리는 동안, 정작 우리 집의 안온한 저녁 식사와 당연했던 평화는 송두리째 파산하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구치소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내가 탕진한 건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이들의 기대와 안식이었다는 것을요. 도박은 돈을 잃는 게임이 아니라 인간성을 탕진하는 죄악이였습니다. 내 비겁했던 침묵이 당신들에게 남긴 눈물이 조금이나마 흐려지길 바라며 고개를 숙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 못난 놈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그 마음들 고맙습니다.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내가 이곳에 갇힌 지도 벌써 3년이 흘렀네. 처음 구속되던 날, 내 잘못으로 인해 당신과 아이들에게 남긴 거라곤 수많은 빚과 절망뿐이었지. 그때는 모든 게 산산조각 나 끝나버릴 것만 같았어. 하지만 현명한 당신이 그 모진 풍파를 홀로 견디며 가정을 지켜준 덕분에 조금은 안정된 마음으로 오늘을 버틸 수 있게 된 것 같아. 5년이라는 형기를 확인하고 차마 기다려달라는 염치없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당신과 아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홀로 남겨질 각오로 "이혼 서류를 보내도 된다"고 했었지. 그때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해주냐"며, "나와서 제대로 살 생각이나 해"고 말했던 당신의 그 불호령 같은 사랑이 나를 다시 살게 했어. 늘 미안하고 또 고마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 내가 여기서 가족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이 순간에도 내 잘못으로 인해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 속에 살고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야. 내가 감히 우리 가족의 안녕을 바라도 되는지, 스스로 물어보며 고개를 숙이게 돼. 그래서 나는 남은 2년의 시간을 단순히 기다림으로 채우지 않으려 해. 출소 후에 다시는 비겁한 길에 서지 않도록 누
사회에서 불같은 성질을 이기지 못해 누군가의 가해자가 되고, 이곳 수용 거실까지 흘러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때 한 번만 참을 걸" 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수용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생의 가장 혹독한 인내심 수업을 받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인내의 연습은 바로 지금, 이 좁은 거실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수용 생활에도 엄연히 지켜야 할 규칙과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고압적인 '방장' 문화는 이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실의 최고 선임이 권위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봉사원이 되어 원활하고 건전한 단체생활을 이끄는 미덕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선임이 중심을 잡고 에티켓을 솔선수범할 때 수용 거실 내 불필요한 다툼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최고 고참이라는 이유로 큰 소리로 주변에 불편을 주거나, 거친 언행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특히 설거지나 청소 같은 공동의 과업에서 "나는 선임이니 열외"라고 주장하는 편향된 태도는 동료들을 괴롭게 만들고 불평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입니다. 권위적으로 군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