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년 넘는 세월을 형사법정에서 살아왔다. 매년 수천 건의 사건이 오가는 재판정에서 피고인의 말 한마디, 판사의 판결문 한 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꿔놓는지를 숱하게 지켜보았다. 또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했고, 범행의 고의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가운데, 최근 대법원에서 나온 한 판결을 통해 다시금 ‘정의’라는 단어의 무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피고인은 일자리를 구하던 중 한 업체로부터 채권 회수 업무를 맡아보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일명 ‘보이스피싱 수거책’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피해자로부터 현금을 수거하고 이를 송금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에 대해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법원은 다시 유죄를 선고하며 원심을 파기 환송하였다. 대법원은 “범죄에 공동 가공하려는 의사가 결합해 현금을 수거했다는 사실을 미필적으로 인식했으면 공범이 된다”고 판시했다. 범행 방식이나 전체 구조를 몰랐더라도, 자신이 범행에 가담했다는 인식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공범이 된다는 뜻이다. 피고인이 고용업체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 높은 수당을 받았다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자주 ‘우발적’이라는 단어를 듣는다. 순간의 분노, 쌓여온 감정,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흔들리고, 그 결과는 종종 법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도 그랬다. 조용한 말투 속엔 무거운 피로가 느껴졌고, 눈빛은 긴 시간 타지에서 버텨온 흔적을 담고 있었다. 그는 수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한국에 정착하려 애써왔지만, 믿었던 동포에게 돈을 빌려주고 연락이 끊겨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찾아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격분해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전치 6주의 진단이 나왔다. 뇌출혈을 동반한 상해 사건으로 처벌이 중한 상해죄가 성립될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의뢰인이 외국인이었다는 점이었다. 출입국관리법상 300만 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강제퇴거 조처가 내려진다. 실제로 상해죄가 인정되면 집행유예 없이 실형까지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의 삶은 한순간에 끝날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도 못 있고, 거기도 못 갑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법률적 대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건 이 사람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
자금세탁 사건에서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가장 흔한 논리는 “보이스피싱 범행에 쓰라고 통장을 준 것이 아니라, 도박사이트 운영에 사용되는 줄 알고 제공했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주장이 재판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보통 대포통장을 개설하여 보이스피싱이나 투자사기 리딩방과 같은 범죄 조직에 제공한 경우, 그 과정에서 유령 법인을 설립했다면 공전자기록등불실기재죄 및 동행사죄가 적용된다. 이후 대포통장으로 입금된 자금을 인출하거나 코인으로 환전하는 등의 자금세탁 행위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위반에 해당한다. 나아가 이러한 자금세탁을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과 공모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전기통신금융사기피해방지및피해금환급에관한특별법위반죄 또는 사기죄의 공동정범 또는 방조범으로 기소된다. 즉, “통장을 넘기긴 했지만 도박사이트 운영 조직에서 사용할 줄 알았다”는 주장은 곧 일부 무죄를 주장하는 셈이지만, 단순히 “몰랐다”는 말만으로는 무죄를 받을 수 없다. 무죄 주장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첫째, 피고인 측에서 공소장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사실관계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하며, 둘째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
초기 수사 단계에서 드러난 절차상의 하자가 무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형사재판의 핵심 원칙인 ‘증거재판주의’, 즉 범죄 사실은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에 의해서만 입증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한 사례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의뢰인은 필로폰 상습 투약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유예기간이 약 2년 남은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의뢰인은 텔레그램 마약 채널에 “품질이 형편없다”라는 항의성 글을 올렸는데, 문제는 거기에 본인의 계좌번호를 남겼다는 점이다. 경찰은 계좌 정보를 통해 신원을 특정했고, 의뢰인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의뢰인은 모발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올 것을 우려해 조사 직전까지 반복적으로 탈색했고, 상의도 없이 은색 머리를 하고 수사기관에 출석했다. 이는 통상 마약사범이 흔히 사용하는 증거인멸 방식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현장에서 긴급 체포됐다. 의뢰인이 원하던 목표는 구속을 피하는 것, 나아가 집행유예 기간을 경과시키는 것이었다. 필자는 수사팀장과의 면담을 통해 의뢰인의 전면 협조 의사를 전달하며 절차에 대해 협상했고, 오랜 설득 끝에 수사기관이 구속영장 신청을 극적으로 철회하도록 했다. 그러나 몇 달 후 의뢰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여전히 많은 변호사들에게 존재한다. 나 역시 처음엔 생소함에 주저했지만, 실제 경험을 통해 전략과 설득의 장점이 많은 절차임을 깨달았다.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는 무죄율이 일반 재판보다 높다는 통계도 있어, 억울함을 주장하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내가 수행한 준강간 사건 역시 국민참여재판 절차를 통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사례였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이 단 한 차례만 조사된 상태였고, 그 진술 자체만으로는 모순을 찾기 쉽지 않은 구조였다. 그러나 수사기록을 면밀히 분석해본 결과, 유전자 감식 결과 주변 증인의 진술이 피해자의 진술과 충돌하는 부분이 존재했다. 나는 이 정황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략은 간단했다. 피해자의 진술 내용에 대해 입증취지만 부인하고, 증거는 동의함으로써 재판부로부터 국민참여재판 회부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참여재판이 결정되면, 법리보다는 사실관계와 설득이 중심이 되는 구조가 형성되기 때문에 배심원을 통해 피고인의 입장을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상과 달리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인이며 2차 피해 우려가 크지
대부분 피해자의 진술 외에 별다른 증거가 없는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 피해자에 대한 증인 신문은 사건의 핵심 절차가 된다. 이러한 사건에서 변호인은 피해자의 진술조서를 증거로 사용하는 데 부동의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검사는 피해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 진술조서의 진정성립을 피해자 본인의 입을 통해 인정받고, 그 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려 한다. 아울러 피해자의 법정 증언 자체도 새로운 증거로 사용된다. 결국 피해자의 조서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법정 증언까지 증거로 추가되므로, 형식상 증거가 늘어나는 결과가 된다. 이로 인해 피고인에게 불리한 절차처럼 보일 수 있지만, 법정에서의 피해자 증언은 반드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변호인은 검사의 주신문이 끝난 후 이어지는 반대신문을 통해, 피해자의 진술과 증언에서 드러나는 모순이나 비논리적인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 수 있다. 다만 실제 재판에서는 피해자가 사전에 충분한 법률 조언을 받고 출석하는 경우가 많고, 수사 단계에서의 진술을 번복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변호인이
변호사가 되어 보니, 재판장과 인연이 있는 판사 출신 변호사를 찾아서 일종의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본다. ‘재판장과 말이 통하는’ 변호사를 찾는다고도 한다. 여기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재판장과 사적으로 잘 알아서 전화를 걸거나 따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판사들 숫자도 적어서 서로 가까웠고,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현직 판사들과 술 한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건을 좀 더 잘 봐주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 3천 명이 넘는 판사들이 있어서 동기라도 서로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요즘 판사는 정년까지 법원에 머물러 있는 추세이다. 판사들 입장에서는 변호사 일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마당에, 잘 알지도 못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라고 괜히 형량을 깎아주고 승소시켜 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현직 판사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 판사들이 재판하는 사건을 수임한다고 해서 잘 봐 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입장에서도 사건 이야기를 하는 순간 관계가 어색해지고 체면이 깎인다. 이것이 현실이다. 간혹 재판장이 내 동기라고 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최근 ‘인천 총기 살인 사건’으로 사형 집행 논란이 다시금 일고 있다. 우리나라는 형법상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집행 관련 절차도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1997년 12월 30일에 23명이 사형 집행된 이후 28년째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이처럼 유명무실한 제도라면 차라리 사형제를 폐지하고,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사형 제도의 존치와 집행 필요성을 여전히 주장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사형제 폐지의 근거로는 보통 인간의 존엄성과 오판 가능성이 주로 언급된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사형이 선고된 사건들에서 다른 범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된 경우는 없었으며, 과학 수사 기법의 발전과 전국적인 CCTV 보급 등으로 인해 범인 검거는 과거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오판의 가능성을 사형제 폐지의 주된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사형제 폐지의 가장 강력한 논거로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가 남게 된다. 필자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관점에 동의하지만, 보다 실질적인 이유에서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메신저 피싱, 투자 사기, 재테크 사기, 코인 사기 등 이른바 보이스 피싱 범죄에 대해 수사기관은 형법상 <사기>가 아니라 <전기통신 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기소하고 있고, 조직원 중 자금 세탁책, 인출책 등에 대해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형법 제114조의 범죄단체 조직죄>까지 실체적 경합범으로 보고 기소하고 있다. 문제는 검찰에서 위 3가지 범죄에 대해 한꺼번에 기소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통신 금융 사기로 기소하여 1심이 선고된 후, 또는 심지어 2심이 선고되어 판결이 확정된 뒤에야 비로소 나머지 범죄사실로 추가 기소하여 법원에서 각형을 받게 함으로써 피고인은 장기간 법정에 서게 된다. 물론 법원에서는 <형법 제39조 제1항(경합범 조항)>을 적용하여 형을 선고하고 있으나, 재판을 받는 처지에서는 되도록 병합하여 판결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서 1심에서 검사에게 나머지 혐의에 대해 최대한 빨리 기소해달라고 의견서를 제출하거나, 직접 대면하여 독촉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속기소 된 전기통신 금융 사기 사건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