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변의 변호사 일기] 사라져 버린 피고인

오늘 하루도 여느 때처럼 바쁘게 시작됐다. 오전 9시, 사무실에서 시작된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의뢰받은 00기업 사건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자료를 정리하고 의견을 조율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1시에 있을 재판 준비도 해야 해서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토하던 중, 핸드폰 화면에 찍힌 부재중 통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7통이나 되는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림이 가득한 중년 여성의 것이었다.

“변호사님... 저 000 엄마예요.”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구인지 바로 떠올랐다. 나는 매달 많은 의뢰인을 만나고,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이름은 잊을 수 없었다. 1년 전 재판에서 내가 변호를 맡았던 피고인이었다. 000, 교도소를 수십 번 다녀온 전과 30범. 내가 만난 의뢰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000은 출소한 지 3개월 만에 또 다른 범죄를 저질러 새벽에 긴급체포되었다. 나는 오후 1시 재판이 끝난 뒤 000이 유치되어 있는 경찰서로 접견을 갔다.

 

변호인 없이 이미 1차 조사를 마친 상태였으며, 죄명은 금융거래법 위반이었다.

 

000은 대포통장을 만들어 투자사기에 유통했으며, 공소금액은 몇백억 원에 달했다. 경찰은 이미 차량 블랙박스와 각종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다. 공범은 총 30여 명에 이르렀고, 다행히 000은 사건의 총책이 아닌 하범으로 분류되었다.

 

000과 총책은 오랜 선후배 사이였으며, 다른 공범들 또한 서로 아는 관계였다. 000은 처음엔 자백을 꺼렸지만, 경찰은 이미 여러 증거와 함께 몇몇 공범을 검거한 상태였다. 경찰의 총책 검거는 시간 문제일 뿐 이였고 000의 자백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른 공범들이 다 자백을 한상태였다.

결국 000은 자백을 결심했고, 경찰 수사에 협조했다.

수사관들의 의견서가 반영되어 1심에서 높은 실형이 예상되었으나, 000은 1년 2개월의 형량을 선고받았다. 이는 출소 3개월 만에 재범한 상황을 고려하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를 제기했고, 000은 다시 나에게 의뢰를 요청했다.

 

추가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보이스피싱 대포통장 사건의 특성상 항소심에서 사건들을 병합해 형량을 낮추는 것이 목표였다. 항소심 2차 변론을 앞두고 000을 접견하러 간 날, 그의 얼굴은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편도가 심하게 부어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긴급히 재판부에 형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중형 이상을 받은 피고인의 경우, 도주 우려로 형 집행정지가 허가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000은 1년 2개월 중 이미 절반 이상을 복역했고, 이를 고려해 재판부는 수술과 회복 시간을 허가했다.

 

000은 형 집행정지를 허가받아 수술을 잘 마쳤고, 건강도 회복되었다. 재판부는 며칠 뒤 변론 재개일을 지정했다. 아마도 재판부는 직접 피고인의 상태를 확인한 뒤 형 집행정지 연장 여부를 판단하려고 한 것으로 보였다.

 

재판 전날, 000과 통화하며 건강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는 많이 회복된 상태라고 말했다. 우리는 재판 30분 전 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도 000은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000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 재판에 들어갔다. 재판장은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형 집행정지를 허가하며 피고인의 건강을 고려했지만 이런 결과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 또한 변호인으로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후 5차례의 변론기일이 더 연기되었고, 재판장은 도주로 간주하며 실형을 선고했다. 결국 괘심죄가 적용되어 형량은 1년 2개월에서 1년 8개월로 늘어났다.

 

000 입장에서는 추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할 상황이 두려웠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변호인으로서는 이번 사건의 결말이 씁쓸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