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되어 보니, 재판장과 인연이 있는 판사 출신 변호사를 찾아서 일종의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본다. ‘재판장과 말이 통하는’ 변호사를 찾는다고도 한다. 여기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재판장과 사적으로 잘 알아서 전화를 걸거나 따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판사들 숫자도 적어서 서로 가까웠고,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현직 판사들과 술 한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건을 좀 더 잘 봐주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 3천 명이 넘는 판사들이 있어서 동기라도 서로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요즘 판사는 정년까지 법원에 머물러 있는 추세이다. 판사들 입장에서는 변호사 일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마당에, 잘 알지도 못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라고 괜히 형량을 깎아주고 승소시켜 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현직 판사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 판사들이 재판하는 사건을 수임한다고 해서 잘 봐 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입장에서도 사건 이야기를 하는 순간 관계가 어색해지고 체면이 깎인다. 이것이 현실이다. 간혹 재판장이 내 동기라고 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유럽의 도시들 중에서 나는 유난히 피렌체를 좋아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미켈란젤로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이 도시는 자유와 창의성의 이미지로 가득한 곳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영화나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소설에서도 피렌체는 인상적인 배경으로 등장하며, 내게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떠난 배낭여행에서 피렌체를 찾았을 때, 나는 그 도시가 가진 예술적 생동감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거리 곳곳에 자리한 가죽 옷 공방들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피렌체에 가면 가죽 재킷 하나쯤은 꼭 사야 한다고 말해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20살짜리 대학생에게는 어울리기 어려운 스타일의 옷들이었고, 그 말을 들은 걸 후회도 했지만, 그 덕분에 공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게 뒤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공방에서는 나이 든 장인과 젊은 견습생들이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원단 위에 초크로 선을 긋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재봉틀 앞에서 집중하며 박음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공방이라는 공간은 그들의 직장이자 삶의 터
판사가 되기 전에는 판사가 되었을 때 증인들의 말과 증거를 살펴보면 소설 셜록 홈즈나 드라마 속 CSI처럼 손쉽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소설이나 드라마가 감추어 둔 사실관계는 두세 가지 증거만 나와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현실 재판에서는 과거 진실을 온전하게 복구하는 데 필요한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증거가 충분히 많다면 피고인이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고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 간에 이견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현실의 법정에서 증거 몇 조각을 가지고 과거의 사실관계를 온전하게 복구한다는 것은 이미 와장창 깨어져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들고 유리창을 복구하는 작업과 같다. 유리 조각의 절반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몇 조각을 집어 들어봤자 그것이 있던 자리가 어딘지 알기 어렵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누군가가 유리 조각에 손을 벤다. 한 마디로 그것이 확실한 진실이라고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가해자는 가해자라서, 피해자는 피해자라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어 온전히 믿기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한 사람들, 그러니까 증인의 말도 법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불신의 대상이다. 제삼자들도 나름의 이해관계가 있다.
법정은 아주 독특한 자기장을 뿜어내는 곳이다. 일반적인 공공기관 청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좁은 공간에서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판사가 있고(거울이 없으니 판사 본인은 그냥 포커페이스이겠거니 생각할 때가 많다. 나도 그랬다), 말을 하거나 다리를 꼬면 경위가 바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주의를 준다. 검사의 표정은 더 불편할 때가 많다. 경직된 표정의 판사와 검사가 회전 버튼을 누른 선풍기 머리처럼 좌우로 천천히 오가고, 경위가 이따금 다가와 귓속말로 눈치를 주는 법정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정 분위기가 그렇게 불편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의심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상대가 거짓말을 할까 봐, 갑자기 난동을 피울까 봐 경계하는 것이다. 서로 신뢰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라면 사뭇 분위기가 다를 것이다. 침묵 대신 웃음꽃이 피고, 말투와 시선에 냉기 대신 온기가 담기고, 경직된 자세로 앉으라고 강요하는 대신 이완된 모습으로 있을 것이다. 법정은 양측이 대결을 펼치는 ‘코트(Courthouse)’이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테니
변호사로서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법정이다. 나는 20여 건의 소수의 사건만 수임하는 입장인데도 일주일에 보통 두세 번은 간다. 세상에 특별한 의미와 권력구조가 부여된 공간이 참 많지만, 법정만큼 좁은 공간에 근대 국가의 권력 구조를 뚜렷하게 반영한 공간도 없다. 판사는 사법부, 검사는 행정부, 피고인과 변호인은 일반 시민의 지위에 있고 이들이 해석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법률은 입법부가 만든 것이다. 즉, 국가권력은 삼권을 분립해서 견제와 감시를 하게 하는 한편, 힘의 균형을 위해 미약한 시민 옆에는 변호사도 붙여 놓은 것이다. 변호사가 된 지금은 판사일 때 법정에 들어가는 방식도, 입구도 달라졌다. 내가 판사일 때는 재판 시간보다 이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법관전용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변호사인 지금은 법정 안으로 들어가서 방청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재판장이 내 사건 번호를 부르면 판사 입장에서 왼쪽, 방청석에서 보기에는 오른쪽에 있는 변호인석으로 나가서 선다. 나의 왼쪽 바로 옆자리에는 내 의뢰인이자 피고인이 앉는다. 이런 자리 배치만 보더라도 내 입장이 판사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사일 때는 가운데 앉아서 누구의 편도 들면 안되었지만 지금은
재판에서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서는 판사를 잘 만나야 한다. 판사들이라는 집단은 그 어느 집단보다도 개별 구성원들이 균일하지 않은 집단이다. 판사들은 상명하복의 구조가 아니다. 사적으로 별도로 친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이상 선배 판사가 후배 판사에게, 부장판사가 배석판사에게 말을 놓는 일도 없다. 이 점은 검사들과 다른 부분이다. 조직 분위기가 이렇기 때문에 3천명의 판사들이 각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판사는 한주에 평균 한 건 이상은 무죄 판결을 쓰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판사는 1년을 일해도 무죄 판결을 한두 건 쓸까 말까 한다. 전자의 판사들은 판사가 무죄로 견제를 해주어야 억울한 사람도 안 생기고 검찰과 경찰이 더 제대로 수사할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무죄 판결을 좀처럼 하지 않는 후자의 판사는 피고인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변호사도 돈을 받으면 그럴싸한 말로 진실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판사 입장에서 무죄 판결을 하게 되면 검사가 항소하면서 법정 안팎으로 반발을 할까봐 신경 쓰이고 부담스럽게 느끼는 판사들도 있다. 그래서 후자의 판사들 중에는 피고인이 무죄 가능성이 엿
(2화에 이어) 1심 판결이 나왔다. 다행히 피고인이 삽입했다는 부분은 무죄가 되었다. 경찰이 삽입을 했느냐고 조서에만 5차례 물었는데 그때마다 피해자는 없었다고 했었다. 그러다 사건 발생 6개월 뒤, 피해자 부친이 합의를 제안했다가 피고인이 거부한 이후에는 삽입이 ‘조금’ 있었다고 진술이 바뀌었고, 1년 6개월 후 법정에서는 ‘강압적으로 삽입’했다고 진술이 변했다는 우리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가 13세 미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판단해서 의제강간죄 미수죄를 인정하고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법정형이 3년 이상의 징역인데, 미수죄가 인정되었으므로 절반이 감경된 하한을 선고한 것이었다. 판결 이유를 보고 나와 영호 가족은 아연했다. 1심 판결은 피고인의 입장(피해자는 나이를 묻는 영호에게 “Y 중 3학년”이라고 말했고 그러자 영호는 “나는 K 고 3학년이야”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을 믿지 않는 근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삶의 여정을 거쳐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서 둘 다 ‘지명 + 학년’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인사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부자연스럽고 연극 대본처럼 조작된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