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수용자의 변호를 맡는 경우 대개 가족이 찾아와서 선임 계약을 한다. 구속된 사람이 가족이나 믿을 만한 조력자가 없으면 좋은 변호사를 찾아서 선임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변호사를 찾으려면 이곳저곳 알아보러 다니면서 정보도 얻고, 평판도 조회하고, 직접 변호사들을 만나 보기도 하고, 수임료 흥정도 해야 하고, 수임료 대납도 해야 하는데 이 모든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가 않다. 사실 가족이라도 이런 일을 다 해 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속이 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극도로 제한된다. 밖에서 제아무리 잘 나갔고, 돈과 권력이 있었고, 똑똑했더라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수의를 입고 수감되면 무기를 빼앗기고 포로가 된 장수처럼 무력화된다. 그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솟아오르기도 한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좁은 공간에 갇히는 것 자체로 형벌을 받는 듯 괴로울 것이다. 그만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은 이런 감정적 어려움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하루하루 새로운 일상을 살고 헤쳐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수용자가 변호사비나 합의금을 잔뜩 남겨 놓고 갔다면 모를까 선뜻 자신이 큰 돈을 내어서 변호사비나 합의금을 대신 내 주기는 쉽지 않다. 그들에게는 당면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비용만 들여서 변호사를 선임해 주고 도리를 다하려 한다고 (수용자에게는 차마 못하는 그 말을 다시는 볼 일 없는 나에게만 대나무숲 앞에서처럼, <화양연화>의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사원 담벼락에서 말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구속된 피고인이 나가자마자 아내에게 수임료를 받으면 된다고 해서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이 두고 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통화녹음 파일을 보고 남편에게 오랜 내연녀가 있었고 그 내연녀도 감옥에 면회를 오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며, 자신은 변호사비를 줄 수 없다며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게 이혼 소송과 상간 소송을 하는 방법을 문의했고, 나도 가정법원 판사 출신으로 그 부분은 잘 알기에 상담을 잘 해드렸다(그분이 격앙되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뒤 그 아내가 내게 곧 이혼소송을 제기할테니 웬만하면 동의해 달라고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런 나쁜 소식은 정말 전하고 싶지 않았고, 접견비나 수임료를 받지도 못했지만 본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선임된 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다시 구치소를 찾아가서 그 아픈 소식을(환자에게 시한부 인생임을 통보하는 의사의 심정이 이럴까) 직접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부모는 다르다. 수용자의 부모는 고령인 경우가 많은데도 거의 매일 10분의 면회를 위해 구치소까지 노구를 이끌고 간다. 종일 돋보기 안경을 끼고 컴퓨터 앞에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굳은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한다. 그러다가 예약을 하지 못하거나 면회 시간을 놓치면 그 부모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내 앞에서도) 미안해하고 자책한다.
그들은 대개 은퇴해서 퇴직금이나 노후자금에 기대어 빠듯하게 생활을 하는데, 자식이 구속되면 그 돈으로 피해자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신 심한 욕을 먹고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읍소하게 된다.
아무리 부모라도 그런 상황에서 자식에 대한 원망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그 원망을 누구에게 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식이 구속되었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며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이렇게까지 속을 썩이나.”하는 정도로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부모도 있다. 그러나 부모는 이내 “자식을 잘못 키운 내 잘못이다”하며 기꺼이 다음 면회를 예약한다.
나는 그 부모를 볼 때마다 의뢰인인 수용자를 떠올리지만, 반대로 자식인 수용자를 접견할 때마다 그 부모를 떠올린다. 대개 수용자 본인보다 그 부모와 훨씬 더 자주 만나거나 전화한다. 특히 우리는 수시로 먼저 연락을 드리는 편이고, 별일이 없더라도 언제든 사무실에 찾아와서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시도록 장려하고 있어서 더욱 가족과 접촉이 깊다. 그러니 구속된 의뢰인들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은 접견할 때마다 그 부모 얼굴도 한쌍으로 같이 떠올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