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의 날, 자축이 아닌 성찰의 날이어야 한다

현장은 없고 지휘부만 있는 그들만의 자축행사

 

 

나는 1992년 1월 교정직 9급으로 임용되어 30년 넘게 교도소 현장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지 2년이 되어가는 퇴직교도관이다.

 

교정의 날은 교도관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어야 하지만, 그날이 다가오면 내겐 언제나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교정의 날은 수용자 교화를 위해 묵묵히 헌신해 온 모든 교정공무원이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 기념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현장은 다르다. 제정된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이 행사는 일부 고위 간부와 교정위원들만의 잔치로 남아 있다. 정작 교도소의 최전선에서 밤낮으로 수용자와 마주하는 하급직 교도관들은 박수조차 받지 못한다.


현장의 땀보다 권력의 위치가 빛나는 날


2002년 첫 교정의 날 행사에서도 훈장과 대통령 표창은 대부분 고위간부와 교정위원들에게 돌아갔다. 장관 표창 몇 개가 말단 직원에게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이후 20년이 흘렀지만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교정의 날이 ‘현장 직원의 날’이 아니라 ‘지휘부의 날’로 고착된 것이다.

 

교정의 날이 형식적인 행사로 전락한 현실은 단순한 의전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교정행정 전반이 현장과 괴리된 채, 제도만 남은 구조적 병폐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퇴직 후 나는 교도관 시절 써두었던 글을 브런치에 연재해왔다. 뜻밖에도 그 글을 읽은 수용자 가족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메일을 보내왔다. 그중 한 가족의 이야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권위의식만 남아


형이 확정돼 P교도소로 이송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인성교육을 받지 못해 여전히 출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금니 통증으로 식사조차 힘들다고 했지만, 의료과는 “차라리 뽑는 게 낫다”며 외부 진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매주 서울에서 KTX를 타고 P교도소를 오갔고,

교도소측에 외부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처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가족에게 “소장님께 편지를 보내보라”고 조언했다. 누나는 손글씨로 정성껏 편지를 써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퇴직교도관으로서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P교도소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부속실은 전화를 총무계장에게 돌렸고, 총무계장은 “자기에게 말하면 된다”며 끝내 소장을 연결해주지 않았다. 다시 전화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며칠 후 가족이 의료과에 전화를 걸어 의료과장과 통화하기를 원했지만, 간호사는 “보고전이 없으면 통화가 어렵다”며 바꿔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직접 의료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간호사가 전화를 받아 의료과장을 연결해주지 않았고, 대신 의료계장과 통화를 하게 됐다.

 

나는 의료계장에게 퇴직교도관 천동성임을 밝히며 의료과장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그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내게 “천동성 씨! 천동성 씨!”라며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댔다.

 

그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퇴직 선배에게조차 이렇게 대한다면, 수용자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권위적으로 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당시 본부장이던 신용해 전 교정본부장에게 통화 녹음 파일과 자료를 보내며 상황을 알렸다. 본부장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감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교정본부 내 감사전담팀은 사실상 기능을 멈춘 상태였다.

 

결국 교정의 날을 상징하는 훈장과 표창은, 현장의 땀보다 권력의 위치를 반영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교정의 날이 다가오면 또다시 훈장과 대통령 표창이 간부들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사이 교정행정의 신뢰는 무너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특별 접견’ 논란, 서울구치소 독방 거래 의혹 등 중대한 사건이 잇따랐지만, 지휘부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지휘부는 책임지는 자세를 잃었고, 교정의 날 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자리를 지키다 승진하는 현실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