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시간보다 법정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변호사이지만 변호사인 나에게도 법정 분위기는 언제나 숨막히게 다가온다. 특히 형사 사건이라면 더 그렇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날씨였다. 실내외 온도차이로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연락을 받았다. 고향 친구와 친한 분이 아동 강제추행으로 수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관을 포함해 누구도 그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에 감기 기운도 잊고 바로 사안 파악을 시작했다. 사건은 이미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 조사가 이미 끝난 상황이라 나는 재판부터 조력을 시작했고, 첫 번째 기일에 일을 저질렀다. “존경하는 판사님,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고자 합니다.” 피해 아동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고 나는 피해자에게 증인 심문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을 제시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공개 국민참여재판으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법정에서의 다툼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어려운 과정이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자료를 검토한 후였지만, 놓친 부분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어 종이가 찢
성범죄 사건은 그 특성상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 명확한 물적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범행이 주로 은밀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장에 제3의 목격자가 존재하기 힘들고, 피해자와 피고인의 말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피고인과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피해자의 진술은 사실상 재판의 핵심 증거가 되어 판결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진술’을 언제나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며,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일부 부풀려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수차례에 걸쳐 동일한 사건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기억이 바뀌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집단적인 정서나 주변인의 영향이 진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나 관계에 의해 사실과 다름에도 일관된 듯한 진술이 형성되는 경우다. 법원이 이 부분을 세밀하게 살피는 이유다. 최근 내가 맡은 사건도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고, 이들 모두가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피해자 모두 진술을 끝냈다. 의뢰인은 그중 한 피해자의 진술 내용은 인정했지만, 나머
충남 당진경찰서 강력2팀 형사 C에게 2020년 7월 2일 자정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온 건 송산면 변사 현장으로 출동한 형사팀이었다. 현장에서 두 자매의 사체가 발견됐다며 빨리 현장으로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살인사건이었다. 형사 C는 강력2팀 팀장과 막내 형사와 함께 서둘러 현장으로 이동했다. 강력2팀이 있던 당진경찰서와 사건 현장이 있던 송산면까지는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였다. 짧은 이동 거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형사 C는 수십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렸고, 쉽지 않은 심각한 사건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형사 C는 사건이 벌어진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한 뒤 동료 형사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췄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혀왔다. 끈적한 공기와 함께 강렬한 악취가 밀려들었다. 변사 사건을 많이 겪어본 형사들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견디기 힘든 냄새였다. 악취는 열려 있는 현관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였다. 형사 C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동료 형사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형사 C는 그 냄새만으로 사체의 부패가 심하다는 걸 알
마약범죄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 당사자와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된 것이 아니면 항소심을 통해 다시 한번 법원에서 판단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심제도’가 있기 때문에 1심(지방법원) 판결에 불복할 경우 2심(고등법원), 그리고 3심(대법원)까지 갈 수 있다. 다만, 대부분 2심에서 사실관계가 다시 정리되고 양형에 관한 다툼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마약 사건의 항소심에선 어떤 전략을 가져가면 좋을까? 항소심에서는 1심 재판에서 다뤘던 증거와 기록을 다시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추가 증거도 받아준다.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소심에서 감형되거나 집행유예가 선고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단, 무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전략을 세워 대응해야 한다. 항소 이유 항소의 이유는 우선, ‘사실오인’ 또는 ‘양형부당’이 될 수 있다. 사실오인은 실제로 마약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투약하지 않았는데 법원이 잘못 판단했을 경우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다. 양형부당은 범죄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1심 판결의 형량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하는 경우다. 마약 사건의 경우, 보통 마약을 소지한 사실 자체가 명확히 드러나기 때
퇴직을 앞두고 지나온 교도관 생활을 되돌아보니,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있었지만 그래도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은 남아 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 해소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업 팀장을 할 때 유독 인상적인 수용자가 있었다.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출역해 성실하게 일하고 모범적인 수용 생활을 하던 무기수 K다. 외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인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자 청부살인을 저질렀고 그 대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온 후 23년간 단 한 번의 징벌도 없이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해 왔고 전임 작업 팀장도 K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인수인계를 할 정도였다. 내가 작업팀장으로 있을 때도 K는 무척 성실하였고, 내가 자리를 운영지원팀장으로 옮기고 1년이 다 되어갈 때도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79세가 된 K는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공장에 열심히 출역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K를 교도소에 그대로 두고 퇴직한다는 것은 교도관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단 하
Q. 두 개 질문 있습니다. 인천에서 월세 집을 알아보며 대출을 문의하던 중, ○○○이라는 여성이 통장을 빌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해 광주은행 계좌번호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광주은행 강남지점에서 3,500만 원이 입금되었고, 000과 함께 있던 남성에게 현금 500만 원과 수표 3,000만 원을 전달한 뒤 100만 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은행을 방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돈을 찾으려 했으나,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이 의심된다며 경찰에 신고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돈이 보이스피싱 피해금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도망가거나 증거를 인멸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기 방조 혐의가 인정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시사법률신문에서 유사한 사례를 보았는데,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돈을 출금해 전달한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거래 실적을 만들어 준다는 명목으로 입금된 돈이며, 피고인이 금전적 이익을 취한 정황이 없어 보이스피싱 범행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두번째로, 저는 과거 마약사범이었으며, 마약을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기 방조 혐의로 경찰서에 있을 때, 경찰이 제 차가 은행
수용자는 접견을 해보고 변호사를 정할 때가 많다. 말하자면 첫 접견은 맞선을 보는 셈이다. 물론 접견은 남녀의 맞선보다 심각하고 무겁지만, 본질적으로 닮은 점도 꽤 있다. 첫째, 접견도, 맞선도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 아주 중요한 인연을 찾는 일이다. 둘째, 결혼 생활도, 재판도, 함께 길을 가보기 전에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셋째, 일단 함께 길을 떠나고 난 뒤에는 원상태로 무르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종합하면 수용자 입장에서 좋은 변호사를 고르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맞선을 통해 배우자를 고르는 것보다 접견을 통해 변호사를 고르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좋은 배우자감은 한 번 보고 확신이 안 들면 거듭 만나보면 되고 연애를 해볼 수도 있지만 변호사에게 마음에 들 때까지 접견을 거듭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원래 좋은 변호인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휴대폰 같은 기계는 제각기 품질이 균일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제각기 품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로펌을 처음 설립할 때 홈페이지를 좀 잘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좋은 제작 업체를 찾는 일이 여간 막막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름이 너무 많이 떠서
요즘 성 관련 사건을 보면, 무엇이 진심인지 모르겠다. 정말 사랑한 것인지, 일방적인 것인지, 상대방이 의사를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원한 것인지. 너무도 많은 다양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마다 실체와 내용, 결론은 달랐다. 한 마디로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나를 찾아온 의뢰인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였다. 사건은 간단했다. “원장님이 프로포폴까지 놓고 강제로 나를 범했어요”가 신고 내용으로 전형적인 강간, 강제추행으로 피고소 당한 사건이었다. 성형외과 원장이었던 그는 좁은 진료실이 내 세상의 전부이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는, 세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저 출퇴근만 열심히 하는 40대 초반의 의사였다. 그의 사정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의뢰인의 병원에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여성이 있었는데, 여성이 먼저 유혹해 왔고 사귀자고 한 것도, 프로포폴을 놔 달라고 조른 것도 여성이 먼저였다고 했다. 의뢰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면서도 사랑한다고 하고, 좀 무섭긴 했지만 의뢰인 역시 그 여성을 사랑했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절실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눌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