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사람들은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심은 캐롤로 가득했고 거리마다 반짝이는 전구와 붉은 리본이 도시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하늘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건 하얀 눈이 아니라 연기였다. 김해시청 뒤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진해졌고, 어느덧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멈춘 곳은 시내에서 불과 500미터에서 떨어진 김해시 구산동 분성산이었다. 다행히 헬기 6대가 곧바로 출동해 불길을 잡았지만 갑자기 발생한 산불은 시가 2,200여만 원 상당의 소나무를 소훼시켰다.
분성산은 형사 K가 근무하는 김해중부경찰서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닷새 후, 분성산에서 또다시 불길이 올라왔다. 야간 산불은 낮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헬기와 소방차 출동이 어려웠고 두 번째 산불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겨울철 건조한 날씨에 산불이 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형사 K는 같은 장소에서 닷새 간격으로 벌어진 산불에 방화를 의심했다.
형사 K는 팀원들과 시청 공무원과 함께 분성산 일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정체불명의 종이 조각들을 발견했다. 불에 반쯤 타버린 파쇄 종이들이었다. 이로써 단순한 산불이 아닌 방화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수사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분성산에는 등산로 입구가 꽤 많은 데다 입구 대부분엔 CCTV가 없었다. 용의자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형사들은 방화 지점과 가까운 도로변의 CCTV를 모두 확인했지만 뚜렷한 용의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국 김해중부경찰서 형사들은 잠복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분성산 일대에 잠복해 방화범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형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1월 6일 자정이 넘은 시간, 또다시 분성산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형사 K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형사팀이 밤낮없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지만 방화범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불을 질렀다. 그것도 이번에는 규모가 훨씬 컸다. 불길은 더 넓게 번졌고 피해도 훨씬 커졌다. 방화범을 놓친 일로 형사 K는 문책을 받았다. 그의 마음이야말로 파쇄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형사 K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한 달 안에 방화범의 꼬리를 잡고 말리라 결심했다.
형사 K의 눈에는 세 번째 방화 장소의 특이점이 눈에 들어왔다. 앞선 두 번의 화재 장소와 달리 이번에는 김해운동장을 통해 올라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코스였다. 해당 코스는 지역 주민 중에서도 일부만이 알 뿐, 외지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길이었다. 형사 K는 산불이 일어났던 시각을 전후로 김해운동장 주변 CCTV를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1월 6일 자정이 넘은 시각 수상해 보이는 인물이 화면 속에 포착됐다. 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분성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화면 속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중년의 남자이고 통통한 몸집이라는 신체적 특징은 잡아낼 수 있었다.
형사들은 방화 용의자로 보이는 그의 동선을 추적했고 CCTV 속 흐릿했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화면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형사 K는 이 자료들을 김해중부경찰서 형사들과 공유했다. 그런데 눈썰미가 좋은 한 형사가 용의자의 얼굴을 가리키며 낯이 익다고 하더니, 2017년 재물손괴 사건으로 조사했던 피의자를 떠올렸다. 눈, 코, 입이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수사팀은 해당 재물손괴 사건의 피의자 신원을 확인했다. 형사 K의 눈에도 그 피의자와 CCTV 속 방화 용의자의 모습이 거의 일치해 보였다.
재물손괴범이었던 A 씨(남성, 50대 초반)는 당시 자기 집 앞에 주차된 타인의 차량이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해당 차량을 때려 부수었고 3백만 원의 벌금을 물었다. 형사들은 방화의 동기가 이 판결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A 씨가 판결에 앙심을 품고 산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과거 숭례문 방화범이 행정적인 문제에 대한 개인적 불만을 방화로 표출했듯 A 씨도 행정 처리에 대한 불만과 그 분노를 위험하게 발산했을 수도 있었다. A 씨의 주거지는 세 번째 불이 났었던 곳과 가까운 김해운동장 주변이었다. A 씨는 정황상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아직 그를 검거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1월 28일, 다시 산불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분성산이 아닌 김해와 부산의 경계선에 자리한 산어산 둘레길 입구였다. 산어산은 산자락 아랫마을이 있었고 둘레길이 잘 되어 있어 수많은 등산객들이 오르는 산이었다. 형사 K는 산불 소식에 신속히 현장으로 출발했다. 산어산으로 향하는 형사 K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분성산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설령 방화로 인한 산불이라고 해도 A 씨가 주거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어산까지 와서 불을 지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이번까지 A 씨의 소행이라면 그의 방화는 계속될 것이었다.
산어산의 불은 다행히도 금방 진화되었다. 산어산은 둘레길이 잘 형성되어 있는 덕에 여기저기 방범 CCTV 설치가 잘 되어 있었다. 형사들은 곳곳에 있는 CCTV 영상을 확보했다. 그리고 형사 K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통통한 체격을 가진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화면 속 남자는 나무 계단을 따라 둘레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다 산기슭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낙엽을 그러모으더니 라이터로 추정되는 물건으로 불을 질렀다. 남자는 불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계단을 따라 내려가 사라졌다.
이로써 산어산에서 발생한 화재는 방화가 확실했다. 형사들은 CCTV에 찍힌 방화범의 동선을 따라 용의자를 추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방화범의 얼굴이 확실하게 찍힌 결정적 장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형사들의 예상대로 방화범은 A 씨였다.
1월 28일 오전 10시, 형사들이 A 씨의 자택을 찾았다. 형사들이 잠긴 문을 두드리며 경찰 신분을 밝히자 잠시 뒤 반바지 차림의 A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사 K는 A 씨에게 산어산 화재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어젯밤 산어산 둘레길에 불을 내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A 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본인은 산어산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고 답했다. 형사 K는 우선 경찰서로 동행해 조사를 진행하자고 했고 A 씨는 별다른 저항 없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뒤에도 A 씨는 완강히 범행을 부인했다. 오히려 형사들에게 증거가 있으면 보여달라 주장하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형사 K는 오히려 잘됐다는 심정으로 산어산 방화 당시의 영상을 A 씨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A 씨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본인의 산어산 방화를 인정했다. 형사 K는 즉시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방화 혐의로 A 씨를 긴급체포했다.
A 씨를 체포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A 씨가 분성산 방화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문 것이다. 형사 K는 그를 강하게 밀어붙여 압박하기보다 조심스럽게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형사 K는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김해시청과 협의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방화 사실을 인정해야 시청 측에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회유했다. 형사 K의 전략은 A 씨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켰고 마침내 분성산 방화 역시 본인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A 씨가 진술한 방화의 이유는 형사 K가 짐작한 대로였다. A 씨는 과거 재물손괴 사건으로 받은 벌금형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 처분 탓에 베트남 국적의 아내를 한국 국적으로 옮기지 못했고 시청에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건 무관심뿐, 소용없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A 씨는 답답한 마음에 홀로 분성산에 올랐다. 처음엔 종이 한 장만 태우며 마음을 달래려 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었고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산불로 번졌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A 씨는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니 기분이 오묘해지며 좋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묘한 쾌감도 오래가진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다시 현실이 A 씨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다시 산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결국 두 번째, 세 번째 방화로 이어졌다. 세 번쯤 저질렀을 때 A 씨는 스스로를 멈춰 세울 다짐을 했다. 분성산을 지키는 경찰들의 존재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 그 욕망은 1월 28일 밤, A 씨를 산어산까지 이끌었다.
그릇된 욕망을 참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산림보호법에 따라 최소 5년 이상 최대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는 데다가, 개인 소유의 산림을 훼손한 피해 보상액만 1억 원이 넘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태워버린 셈이었다.
형사 K는 크리스마스 방화범을 체포하고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후련함을 느꼈다. 산불 방화 사건은 특성상 목격자도 드물고 증거 확보도 까다로워 범인을 잡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이번 사건은 연쇄 방화로 번질 가능성까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하지만 형사 K는 빠른시간 안에 범인을 특정해 냈고, 결정적인 순간에 추가 범행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 짧은 사이에 더 많은 산림이 잿더미로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