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종덕 교도관...‘억울함을 끝까지 믿어준 사람’

가석방 보증부터 재심 증언까지 이어진 30년 동행
출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은 연락과 신뢰의 시간
전과자도 다시 설 수 있다고 끝까지 믿어준 교도관

 

30년 넘게 교정 현장에서 수용자 곁을 지켜온 박종덕 교도관은 사범대에서 역사를 전공했지만 교사 대신 교도관의 길을 택한 그는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무죄가 확정된 윤성여씨와 1993년 처음 만났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윤씨를 위해 신원보증을 서고, 가석방 이후에는 취업과 거처까지 도운 인물이다. 2019년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 과정에서는 법정에 직접 증인으로 나서 “무죄라고 믿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수용자에게서 온 편지 수백 통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고, 출소자로부터 6년째 감사 문자를 받고 있다는 그는 “죄명보다 사람을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박 교도관에게서 윤씨와의 인연, 교정의 의미, 그리고 후배 교도관과 수용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Q.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 대신 교도관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맞습니다. 원래는 역사 교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교도관 시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아버지가 “학생만 가르치는 게 교육이 아니다. 교도소에서 사람을 바꾸는 것도 교육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크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시험을 본 뒤 1993년 청주교도소에 발령을 받으면서 교정 업무를 맡게 됐습니다.

 

Q. 윤성여씨와의 첫 만남이 기억에 남으실 것 같습니다.


A. 20대 초반의 정말 앳된 청년이었습니다. 얼굴도 하얗고 인사성이 밝았어요. 선배들이 “저 친구가 화성 사건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줬죠. 겉모습만 보면 너무 순박해 보이니까 ‘이렇게 생긴 아이가 정말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고, 1993년부터 자연스럽게 그를 지켜보게 됐습니다.

 

 

Q. 당시에는 윤씨의 무죄 주장을 믿기 어려웠을 텐데, 끝까지 믿게 된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A.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저도 안 믿었습니다. 많은 수용자가 “나는 무죄다”라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윤씨는 달랐습니다. 끝까지 일관되게 억울함을 말했어요.

 

어느 날 “형사보상금 같은 건 필요 없다. 나중에 죽어서 어머니를 만났을 때 떳떳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진심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윤 씨가 무죄라고 믿게 됐습니다.

 

Q. 이후 윤씨의 가석방을 위해 거처와 신원보증까지 직접 맡으셨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요.


A. 16년 동안 같은 교도소에서 지내며 신뢰가 쌓였습니다. 윤씨는 가석방을 여러 번 신청했지만 계속 탈락했습니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은 됐지만 갈 곳이 없고, 보증을 서줄 사람도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가족들도 이미 발길을 끊은 상태였고요.

 

어느 날 저에게 “가석방으로 출소하려면 취업과 거처가 필요한데 교도관님이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제가 직접 택배회사 취업보증을 서고, 보호시설 입소 확인을 받아 분류과에 제출했습니다. 그게 결정적으로 작용해 2009년 8·15 가석방이 이뤄졌습니다. 출소 후에는 ‘뷰티풀라이프’에서 3년가량 지내며 사회 적응을 준비했습니다.

 

Q. 2019년 이춘재의 자백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상황과 심정도 궁금합니다.


A. 대전교도소 근무 중이었는데 윤씨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습니다. 당시에는 이춘재가 일부 사건만 자백한 상태였고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윤씨는 “재심을 맡아줄 변호사를 알아봐 달라”고 했고, 제가 아는 변호사분들께 연락했지만 모두 가능성이 낮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점심을 먹다가 인터넷을 보는데, 이춘재가 화성 8차 사건까지 자백했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윤씨에게 전화해 “네 사건도 마침내 밝혀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만큼 기쁜 시간은 다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박준영 변호사님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Q. 이춘재 자백 이후에도 한동안 윤씨를 진범처럼 다루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직접 나서기도 하셨죠.


A. 맞습니다. 자백이 있었는데도 경찰 입장을 중심으로 윤씨를 범인처럼 묘사하는 기사들이 계속 나왔습니다. 너무 억울했습니다. 당시 한 일간지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는 이 친구를 오랫동안 봐왔는데 무죄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했죠. 기자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길래 “나는 윤씨를 오래 지켜본 교도관이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뒤로 윤씨와 함께 기자를 처음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게 윤씨의 첫 언론 인터뷰였습니다.

 

Q. 재심에서는 법정 증인으로도 직접 나서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요?


A.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본 만큼 법정에서도 “나는 이 사람이 무죄라고 믿는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동료 교도관들조차 “대법원 확정 판결도 뒤집힐 수 있느냐”며 회의적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들 “당시에는 몰랐다. 미안하다”라고 말합니다.

 

Q. 출소자들이 교도관님께 편지를 많이 보낸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연락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A. 지금까지 받은 편지가 400~500통은 될 겁니다. 수용자들도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고 싶으니 편지를 보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최대한 다 답장을 해주려고 합니다. 대부분 ‘이런 처지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내용입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조언을 적어 보내요. 

 

지금도 편지가 계속 옵니다. 출소자에게 교도관은 여전히 마지막으로 연락해 볼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Q. 사회에서 바라보는 출소자·전과자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냉담합니다. 교도관님은 이들이 다시 바뀔 수 있다고 보시나요?


A. 대전교도소에 15년 정도 복역한 장기수 한 명이 있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스님 한 분이 가끔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마땅한 거처가 없어 제가 세종에 있는 한 회사에 부탁해서 출소하자마자 취업을 시켜줬습니다.

 

이 친구는 2019년 6월 3일부터 지금까지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월요일마다 감사 문자를 보냅니다. 올해로 6년째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삽니다”라는 문자가 꾸준히 옵니다. 제가 답장을 늦게 하면 서운해할 정도예요.

 

또 성폭력 범죄로 수용됐던 한 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교육 과정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변하려는 모습을 보여 다시 기회를 줬고 결국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지금은 열관리 기술을 배워 취업했고, 제가 충주에서 근무할 때 직접 차를 몰고 찾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은 정말 바뀔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Q. 곧 퇴직을 앞두고 계신데 후배 교도관과 수용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또 퇴직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세우고 계신가요?


A. 저는 후배 교도관들에게 늘 “사람부터 보라”고 말합니다. 죄명과 형기보다 그 사람 자체를 먼저 보지 않으면 선입견이 생기고, 그 순간 교정은 어렵습니다. 또 수용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이 쌓여야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를 기반으로 “출소하면 이렇게 해보자” 하고 방향을 함께 찾을 수 있습니다. 취업을 연결하거나 보호시설을 연계해 주는 일들도 결국 이런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퇴직 이후에는 교정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사회에 계속 나누고 싶습니다. 교도소 안에서의 이야기와 출소자들의 삶을 솔직히 전하는 유튜브를 준비하고 있고, 현재 짓고 있는 전원주택 안에 작은 스튜디오도 마련할 계획입니다. 교정 현장에서 받은 것을 퇴직 이후에도 사회에 돌려주는 방법을 계속 찾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