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고객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고객은 내가 변호한 피고인의 어머니였는데, 그 피고인은 미성년자의제강간죄로 기소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영호(가명)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함께 한 동료 이민진 변호사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시간이 좋았기에 다음에 또 한번 만나기로 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 변호인과 고객이 사적으로 만나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영호의 어머니와 계속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영호의 재판 결과가 기대했던 것만큼 좋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호는 일부 무죄를 받았다. 나는 식사 자리에서 다시 한번 기대했던 결과를 내지 못해 송구하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진심으로 변론해 주신 것을 잘 안다며 격려해 주었다. 대신 우리는 잘못된 판결이 남긴 고통과 상처를 서로 위로했다. 어머니는 믿어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자 온 세상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듯한 고립감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피고인들을 여럿 보았다. 사실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억울함을 제대로 알아줄 사람은 변호인뿐이다. 친구나 가족도 있겠지만 변호인만큼 사건의 내용과 그
판사 생활을 하다가 변호사가 되니 달라진 것이 많지만, 가장 다른 것 중 하나가 판결 선고일에 느끼는 감정이다. 판사 때는 판결 선고일이 시험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는 마감 시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되니 선고일이 시험 당락 발표일 같다. 붙느냐 떨어지느냐에 따라 희비가 크게 좌우되는 중요한 입시나 취직 시험 결과의 발표일 말이다. 선고일이 가까워질수록 신경이 쓰인다. 선고 결과가 유죄일지, 무죄일지, 실형일지, 집행유예일지 생각하게 되고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변호사도 이러니 당사자는 오죽할까. 그래서 의뢰인들은 선고일이 가까워지면 특별히 알릴 소식이 없어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괜히 내게 전화하곤 한다. 의뢰인들 중에는 변호사에게 별다른 일이 없이 전화하기가 미안해 참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선고 전날에는 내가 먼저 의뢰인에게 연락을 드리는데, 모두 좋아하신다. 그런 날의 통화에서는 이미 서로가 수없이 이야기했던 말들이 오가지만 그러면서 서로 불안한 마음이 진정된다. 판사일 때는 판결을 선고한 직후부터 후련했다. 그 순간부터 그 사건에 대한 고민의 의무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결과에 따라 판사의 기분이 달라질 것은 없다. 유죄 판결
4. 1. 만우절 아침에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니 장제원 전 국회의원의 사망 소식이 곳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전날 밤 11시 반경 서울 강동구 오피스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장 의원은 10년 전 부친이 이사장이던 부산 모 대학 부총장 시절 여비서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장제원 의원은 내가 일면식도 없고 특별히 호감을 가졌던 정치인도 아니다. 그런데도 만우절 오전 내내 유쾌하지 않은 거짓말에 속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해졌다. 피해자도 걱정된다. 성폭력으로 인해 10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이제 어렵게 용기를 내서 법적,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제 장 의원의 자살로 더 큰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부디 불필요한 죄책감과 못난 사람들의 입길에 마음을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법복을 벗고 작년부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보니 이제는 변호사의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변호사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내가 장 의원의 변호인이었다면 어떤 조력을 했어야 했을까. 변호사인 내 입장에서는, 일을 하면서 의뢰인이 진짜 억울하다는 것을 확신할수록 힘이 더 난다. 진실 자체가 가장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갈 여유가 없어서 직원들과 배달의 민족(‘배민’)으로 유명 유튜버가 추천했다는 비싼 김밥(‘김밥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도 있다)을 3인분 시켰는데 달랑 2인분만 왔다. 직원이 바로 배민에게 얘기하고 1인분 금액 9천원의 환불을 요구했으나, 배민은 김밥집 사장이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고 한다. 배민 싸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 김밥집에는 우리와 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수많은 댓글이 달려있었다. 주문한 양과 배달한 양이 불일치한다, 그 뒤로는 연락을 받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찾아가서 항의하기 전에 빨리 환불을 해달라 등등. 오늘 직원들과 함께 어느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직접 한번 그 김밥집에 가보자고 했다. 김밥집은 유리벽 내부가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초록색 썬팅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왼쪽 구석에 고속버스 터미널 매표소 같이 작은 문이 나 있고 그 앞 테이블 위에 주문을 받아서 만든 김밥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 창구도 내부를 잘 볼 수 없도록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안을 힐끔 살펴보니 또 하나의 벽 위로 ‘출입엄금 – 이곳은 나의 사유지이므로 방해할 수 없음’이라는 취지의 글이 빨간색 손글씨로 적혀 있어서, 역시 뭔
구금된 사람에게 변호인은 특히 더 중요하지만 일단 구금이 되어버리면 변호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든든한 가족이 있으면 예외이다. 가족이 나서서 어떤 변호사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수임료도 내주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든든한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이 없거나 있더라도 사이가 안 좋거나 경제력이 없을 때도 많다. 언젠가 지방에 있는 어느 구치소에 접견을 갔던 일이 떠오른다. 중년의 남자 피고인이 나를 선임하고 싶다면서 수임료는 자신이 쓴 메모지를 처에게 보여주면 바로 줄 것이라며 처의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바로 다음 주에 다시 접견하기로 했다. 나는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처에게 전화를 해보았는데 처는 냉랭한 목소리로 남편 휴대폰에서 내연녀와 통화 녹음 파일을 잔뜩 발견했다면서 오히려 가정법원 판사로도 일했던 나에게 이혼 소송 및 상간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법적 자문을 구했다. 그 처는 나에게 구치소에 가서 남편에게 합의 이혼을 하도록 설득해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나는 수임료를 받지도 못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주에 올 나만 기다리고 있는 피고인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지방 구치소까지 가서 접견을 하며 내가 더 이상 올 수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로 피의자 접견을 가는 날이다. 서초동 사무실에서부터 차를 직접 운전해서 예술의 전당 앞 지하 터널로 파고들어 과천을 관통한 다음 인덕원역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틀어 의왕으로 향한다. 구치소 주소는 네비게이션이나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다. 전쟁이 터지면 적이 우리나라를 교란시키기 위해 교도소 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에 그 위치는 보안 사항이다. 원래는 서울을 벗어나서 경기도 외곽으로 접어들면 소풍을 가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지만, 구치소에 가는 길 위에서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는 묵직한 자동차처럼 착 가라앉는다.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을 가장 실감할 때가 구치소로 접견하러 갈 때다. 접견은 오로지 변호사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사도, 검사도, 대통령도, 가족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면 구치소 입구를 막고 있는 바리케이트 밖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야 하지만, 내가 변호사 신분증을 보여주면 바리케이트가 올라가고 차를 구치소 뜰 안에 주차할 수 있다. 수용자(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가족조차 하루에 면회는 10분만 가능하지만 변호사는 원칙상 시간 제한 없이 접견이 가능하다. 주차를 하고 구치소 입구에서 변호인이 들어가는 창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