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에 이어)
1심 판결이 나왔다. 다행히 피고인이 삽입했다는 부분은 무죄가 되었다. 경찰이 삽입을 했느냐고 조서에만 5차례 물었는데 그때마다 피해자는 없었다고 했었다. 그러다 사건 발생 6개월 뒤, 피해자 부친이 합의를 제안했다가 피고인이 거부한 이후에는 삽입이 ‘조금’ 있었다고 진술이 바뀌었고, 1년 6개월 후 법정에서는 ‘강압적으로 삽입’했다고 진술이 변했다는 우리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가 13세 미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판단해서 의제강간죄 미수죄를 인정하고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법정형이 3년 이상의 징역인데, 미수죄가 인정되었으므로 절반이 감경된 하한을 선고한 것이었다.
판결 이유를 보고 나와 영호 가족은 아연했다. 1심 판결은 피고인의 입장(피해자는 나이를 묻는 영호에게 “Y 중 3학년”이라고 말했고 그러자 영호는 “나는 K 고 3학년이야”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을 믿지 않는 근거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삶의 여정을 거쳐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서 둘 다 ‘지명 + 학년’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인사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부자연스럽고 연극 대본처럼 조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판사가 상식이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기가 다니는 학교와 학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오히려 나이를 학년이 아니라 “12살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성인이든 학생이든 먼저 소개한 사람이 자신을 소개한 방식에 맞추어서 본인을 소개하기 마련이다. 한쪽이 먼저 학년으로 나이를 소개했는데 상대방이 “12살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밖에도 이상한 판단들이 적지 않았다. 이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증인이 20살 정도로 보였다고 진술했는데도 이 사건 당일에 피해자를 보지도 않은 판사가 “피고인을 만날 당시 피해자는 성인과 착각될 만큼의 차림새도 아니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또 법정에 나온 피해자의 외모가 단정했고 목소리가 앳되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화장에 능한 피해자가 법정에 올 때는 얼마든 단정하게 꾸밀 수 있는 것이고, 30대 판사의 눈에 그보다 어린 사람의 목소리는 대게 앳되어 보일 수 있는 것이므로 이는 매우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1심 판결이 피고인이 피해자가 13세 미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판단한 사실상 거의 유일한 근거는 피고인이 자신의 나이를 “12살이야”라고 말했다는 피해자의 두 차례 진술뿐이었다.
법정에서는 사건 당시에 오고 간 ‘말’이라고 기록에 적힌 ‘글’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재판은 사실상 서면으로 진행되는 서면재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말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물론 말한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재판은 기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대화 내용이 실제 현실보다 비중이 대폭 커져서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법원은 흔히 피해자의 진술에 구체성과 일관성이 있다는 이유로 신빙성을 인정한다는 논리를 맹목적으로 적용한다. 사실상 글로 남은 말의 일관성일 뿐이다. 그래서 울면서 하거나 웃으면서 한 진술이 ‘워딩’만 대충 같으면 일관성이 대개 인정된다. 고작 두 번만 반복되어도 일관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지어내서 앵무새처럼 반복하면 피고인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도저히 반박 불가능한 수준으로 입증하지 않는 이상 성범죄자가 되고 만다. 피해자의 진술에 구체성이 있으면 신빙성을 인정하는 이유는 피해자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렇게 복잡하고 구체적인 진술을 꾸며내거나 외워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법정에서는 너무 간단한 진술에도 구체성과 신빙성을 인정한다.
게다가 이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나이 인식보다도 삽입 여부였다. 과하게 피해자에게 우호적이었던 1심 판결조차 피해자 진술을 믿지 않고 삽입 부분을 무죄로 판결했다.
그러면서도 1심 판결은 “12살이야”라는 진술만을 따로 떼어내서 ‘일관성’이 있다면서 오로지 그것만을 근거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