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파트너스] 형사법정에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처리’하기에 급급한 법정의 현실
겨우 2쪽에 불과한 판결문도 있어
‘빠른 재판’ 아닌 ‘깊은 재판’ 필요
정의는 실질적 변론권 보장서 나와

 

나는 30년간 형사재판정에 서 왔다. 수천 건이 넘는 형사 사건을 수행하며, 억울한 사람도 봤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도 보았다. 법정에서 때로는 유죄 선고가 너무 가볍게, 또 때로는 무죄 선고가 너무 쉽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이 법정에 과연 정의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그 질문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1995년,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오제이 심슨 사건’이다. 미국 풋볼의 영웅이자 배우였던 오제이 심슨은 자신의 전처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친구 론 골드먼을 칼로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모든 정황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피해자의 피가 묻은 그의 차량, 자택에 남겨진 피 묻은 장갑, 수차례의 폭력 전력, 심지어는 도망치듯 경찰을 피해 도주한 장면까지 공개되며 미국 국민 대부분은 ‘그가 유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제이 심슨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이끌어 낸 결정적인 증거는 ‘글러브’였다. 검찰이 제시한 피 묻은 장갑을 법정에서 직접 착용해 본 심슨은 “If it doesn’t fit, you must acquit(장갑이 맞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변호인 논리에 힘입어 배심원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재판은 단순한 사실 판단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이라는 인간 심리에 대한 설득의 장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 형사재판에서 무죄는 ‘피고인이 무죄라는 확신’이 아닌,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에 내려진다는 점이다. 즉, ‘합리적인 의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죄’가 원칙이다. 이 원칙은 형사사법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이다. 그것이 실현되었기에, 오제이 심슨은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법정은 어떤가? 형사재판은 ‘형벌권’이라는 국가의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집행하는 자리다. 사람의 자유를, 때론 삶 전체를 박탈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곳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 사람에게 죄를 인정하고 형을 선고하려면 그만큼의 ‘확신’이 필요하다.

 

단순한 의심이나 막연한 심증이 아닌,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모두 넘은 ‘증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형사재판정의 현실은 어떠한가?


법원에서 하루에 열리는 공판의 수는 과장을 조금 보태 수백 건에 달한다. 10분 단위로 공판이 빼곡히 잡힌다. 증인신문이 진행되더라도, 그 신문 이후 다시 판결이 나기까지는 몇 달이 흐른다.

 

그 사이 판사는 수백 건의 다른 사건을 처리한다. 판사들이 증인의 얼굴이나 태도, 답변의 뉘앙스를 그 긴 시간 동안 기억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의 현장감이 판결에 온전히 반영될 수 있을까? 증인신문에서 결정적인 진술이 있었고, 그에 대해 반대신문으로 설득력 있는 논파가 이뤄졌다면, 재판부는 그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현실에서는 기록만 쌓여갈 뿐, 재판은 점으로만 이어지고 그 점들이 나중에 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번의 기일이 지나면, 그다음 기일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사건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현실이다. 사건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단지 기록으로 존재할 뿐이다. 무엇보다 재판부가 스스로 “재판이 산적해 있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는다.

 

그것은 ‘재판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증인신문이 길어지면 잘라버리고, 피고인의 마지막 진술이 길면 ‘요지만 말하라’고 끊어버린다. 반면 피고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는 판결문은 불과 2쪽 자리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는다. 이 재판정에 과연 ‘정의’가 존재하는가? 지금의 재판정에는, 충분한 숙고의 시간보다 ‘처리’와 ‘소각’의 시간이 더 많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형사재판에 정의가 존재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정의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오제이 심슨 사건에서 무죄가 가능했던 이유는,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판사의 사건에 대한 집중, 그리고 실질적 변론권 보장 속에서 피어났다.


정의는 그렇게 생긴다. ‘빠른 재판’이 아니라 ‘깊은 재판’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난 변호사로서 억울하고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그런 피고인들을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피고인을 대신해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