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은 피해자 진술이 핵심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범행이 은밀한 공간에서 발생해 물증이나 목격자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진술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는 유·무죄 판단뿐 아니라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신뢰와도 직결된다. 형사재판에서 공소사실의 증명책임은 검사에게 있으며, 유죄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돼야 한다. 이 원칙은 성범죄 사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성인지적 관점은 피해자의 반응을 고정관념에 따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신고가 늦었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 피해 이후 가해자와 연락하거나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는 사정만으로 진술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반응은 연령과 성격, 가해자와의 관계, 범행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지적 관점이 피해자 진술을 당연히 사실로 인정하거나 유죄의 증명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니다. 진술의 주요 내용이 일관되고 구체적인지,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과 부합하는지, 범죄 성립을 좌우하는 핵심 부분에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이 없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변적인 표현 차이나 사소한 기억의 불일치를 곧바로 허위 진술의
형사소송법은 수사기관이 물건을 압수한 경우 압수 목록을 작성해 소유자·소지자·보관자 등에게 교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압수 목록은 언제까지 교부해야 할까. 뒤늦게라도 작성해 전달하면 절차상 문제가 없는 것일까. 대법원 2024년 1월 5일자 2021모385 결정은 압수 목록 작성·교부가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라 국가의 강제수사를 통제하고 적법성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임을 분명히 했다. 수사기관은 물건을 압수하면 압수 경위를 담은 압수조서와 압수물의 품종·명칭·수량·외형상 특징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압수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압수 목록은 압수물의 소유자나 소지자, 보관자 등에게 교부해야 한다. 압수 목록은 수사기관이 실제로 무엇을 어느 범위까지 압수했는지 확인하는 사후 통제수단이다. 피압수자가 압수물의 환부·가환부를 청구하거나 압수처분의 적법성을 다툴 때도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대법원이 압수 직후 현장에서 목록을 작성해 교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보는 이유다. 이 원칙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에 따른 압수뿐 아니라 소유자나 소지자가 물건을 스스로 제출하는 임의제출물 압수에도 적용된다. 물건을 확보한 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단 압수한 뒤에는 국가가 해
교정시설이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70세 이상 수용자는 2017년 951명에서 2025년 1916명으로 두 배, 80세 이상은 81명에서 273명으로 세 배 넘게 증가했다. 고령수용자가 늘면서 고혈압·당뇨·심혈관질환 같은 만성질환은 물론 근감소증과 낙상, 인지기능 저하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노인 전담 교정시설을 확대하려는 법무부의 방향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고령수용자를 한곳에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료·간호뿐 아니라 운동과 재활, 영양관리, 치매·노쇠 선별, 일상생활 지원을 포괄하는 고령친화적 처우체계를 갖추고 이를 신설·개축 시설의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2025년 교정시설에서 관리한 고혈압 환자는 1만4000여명, 당뇨 환자는 8000여명으로 1일 평균 수용인원의 각각 약 22%와 13%에 달한다. 통계 산출방식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교정의료가 급성질환을 사후 치료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만성질환을 예방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로 전환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혈압과 당뇨는 투약만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생활습관 관련 질환이다. 식사와 체중, 운동을 함께 관리해야 하지만 수용자는 생활환경을 스스로
교도소 안에서는 외부에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교정공무원들은 작은 징후 하나가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보이지 않는 노력을 이어간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인명사고가 거듭될 때면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에라도 기대고 싶은 것이 교도관들의 심정이다. 2000년대 초 천안소년교도소에서는 크고 작은 인명사고가 잇따랐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사고 소식이 전해질 만큼 어수선한 시기였다. 아침 점검시간에 번호를 잘못 말했다는 이유로 다른 수용자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수용자가 숨지는가 하면, 가족 만남의 날 행사에서 어머니가 챙겨 온 점심을 먹은 수용자가 그날 오후 갑자기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수용자와 경비교도대원의 자살 사고에 이어 정화조 인근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경비교도대원이 실족해 숨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소장과 보안과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사고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좀처럼 사고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액운이 끼어도 단단히 끼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불교 종교행사를 위해 교도소를 찾은 한 스님이 교회당 앞 연못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뜩이나 옹녀 터라 음기가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1910년 7월 20일 영국 하원 연설에서 “범죄와 범죄자를 대하는 대중의 분위기와 태도는 한 나라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라고 강조했다. 교정시설은 사회의 가장 어둡고 닫힌 공간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국가의 품격과 인간 이해의 수준이 드러나는 장소다. 최근 교도소 냉방 논란도 이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 범죄자에게 에어컨이냐”는 반응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가 제한된 공간, 과밀한 거실, 환기가 어려운 노후시설, 고령·질환 수용자의 증가는 더위를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생명과 질서의 문제로 만든다. 『2026 교정통계연보』에 따르면 2025년 전국 교정시설의 수용정원은 5만614명인 데 비해 1일 평균 수용인원은 6만3680명으로 수용률이 125.8%에 달했다. 교정공무원 정원 기준 1인당 1일 평균 수용인원도 3.8명으로 전년보다 늘었다. 더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교정공무원은 더 많은 수용자와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폭염이 교정시설 안에서 생명과 질서의 문제가 되는 이유다. 고(故) 신영복 교수는 1985년 8월 28일 동생의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에서 여름 징역살
수사 구조의 개편이 다시 한번 우리 형사 사법의 지형을 흔들고 있다. 이번에는 검사가 송치된 사건을 직접 보완 수사하던 권한을 폐지하고, 검찰수사관 제도마저 전면 폐지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제도의 이름은 무겁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하나의 절차가 사라지는 것이 실무의 현장에서 어떤 결과로 번져 나가는지를, 본 변호인은 30년에 걸쳐 형사사건을 수행하며 몸으로 익혀온 감각으로 가늠해 본다. 제도는 몇 가지의 조문 변경만으로 바뀌지만, 그 파장은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보완수사권은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눈이었다. 보완 수사에는 본래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검사가 송치된 사건의 미진한 부분을 스스로 직접 채우는 보완수사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미진한 부분을 경찰에게 지적하여 추가 수사를 요구하는 보완수사요구권이다(형사소송법 제197조의2). 이번에 사라진 것은 검사가 직접 수사하여 공백을 메우던 보완수사권이며, 경찰에게 요구하는 보완수사요구권 자체는 그대로 남았다. 검찰수사관 제도까지 폐지되면서 검사가 스스로 사건을 파고들 물리적 수단마저 사라졌다. 목격자 진술이 서로 엇갈리거나 범행 일시가 특정되지 않았거나 압수물의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
지난달 서울 강남의 대형 유흥업소 ‘구○○’에 광역수사대 소속 수사관 30여 명이 출동했다. 수사관들은 해당 업소에서 성매매가 이뤄진다는 제보를 토대로 위장 수사에 나섰다. 일부 수사관이 손님으로 가장해 업소를 방문한 뒤 영업부장과 웨이터를 통해 성매매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여성 접객원들과 대가를 협의했다. 협의가 끝나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수사관들이 업소에 진입했다. 여성 접객원들은 현장에서 적발돼 조사를 받았고, 영업부장과 웨이터 등은 성매매 알선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됐다. 이 사건에서는 실제 성행위가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업소 관계자에게 성매매 알선죄가 성립할 수 있는지가 문제 된다. 성매매처벌법 제21조 제1항은 ‘성매매를 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성매매죄는 성교행위나 유사성교행위가 실제로 이뤄져야 성립한다. 이 법은 성매매 알선 등과 달리 성매매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미수범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위장 단속 경찰관은 처음부터 성을 매수할 의사가 없다. 여성 접객원도 경찰관과 성행위를 하기 전에 단속됐으므로 이 위장 수사 건만 놓고 보면 성매매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반면 성매매 알선죄는 다르게 판단된다. 성매매 알선은 성매매 당사자 사이에
지난 7월 29일 오전 수원역 앞 로데오거리에서 20대 여성이 바닥을 구르거나 네발로 기어 다니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며 배회하다 경찰에 발견됐다. 간이검사에서 필로폰 양성 반응이 나왔고 여성도 투약 사실을 인정하면서, 경찰은 건강 상태를 고려해 가족에게 인계한 뒤 의료기관에 입원시켰다. 현장에서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확보하고 의료적 보호로 연결한 조치는 적절했지만, 입원 이후 중독평가와 전문치료, 상담과 사례관리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번 대응 역시 일시적인 위기 수습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마약을 투약한 여성이 거리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약류 범죄의 중심 연령대로 떠오른 ‘20대’와 별도의 치료·회복 지원이 필요한 ‘여성’이라는 두 특성이 한 사람에게 겹쳐 나타났다는 점이다. 시민에게는 충격적인 이상행동으로 보였겠지만, 그 이면에는 청년 여성의 중독과 정신건강 위기, 관계적 취약성, 그리고 거리에서 발견될 때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예방·치료체계가 놓여 있다. 대검찰청의 『2025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마약류 사범은 2만3403명으로 전년보다 1.7% 증가했고, 이 가운데 20·30대가 약 60%
형사재판에서 때로 가장 중요한 증거는 흉기나 CCTV가 아니라 “함께 있었다”는 사람의 말이다. 음주 운전도 마찬가지다. 같은 차에 탔다는 사실과 음주 운전을 방조했다는 사실은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가 혼동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음주 운전 동승자가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법원은 일정한 요건이 갖춰지면 동승자에게도 도로교통법 위반(음주 운전) 방조죄를 인정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방조죄가 인정되는 기준과 실제 판례를 통해 그 경계를 살펴본다. 형법 제32조 제1항은 “타인의 범죄를 방조한 자는 종범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방조범이 성립하려면 ① 정범이 범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② 그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직접·간접의 모든 행위가 있어야 한다. 유형적·물질적 방조뿐 아니라 무형적·정신적 방조도 포함되며, 방조의 고의는 미필적 인식이나 예견으로도 충분하다. 종범의 형은 정범의 형보다 감경한다(형법 제32조 제2항). 음주 운전 방조죄의 경우 도로교통법 제148조의2 및 형법 제32조 제1항이 적용되며, 방조 감경 후 벌금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 법원이 음주 운전 동승자에게 방조죄를 인정하는 핵심
마약 사건은 텔레그램과 다크웹, 랜덤채팅 등 익명성이 강한 공간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특성상 일반적인 수사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수사관이 구매자로 가장해 판매책에게 접근하거나, 이미 체포된 피의자와 정보원을 활용해 상선과 공급망을 추적하는 위장거래 수사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대법원은 함정수사를 크게 ‘기회제공형’과 ‘범의유발형’으로 구분한다. 이미 마약을 판매하거나 투약할 의사를 가진 사람에게 거래 기회를 제공해 범행을 적발하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적법한 기회제공형 수사로 평가된다. 반면 수사기관이나 수사기관과 밀접하게 연계된 사람이 친분관계를 이용하거나 반복적인 부탁과 설득, 심리적 압박, 금전적 유인 등을 통해 본래 범의가 없던 사람에게 범행을 결심하게 했다면 위법한 범의유발형 함정수사에 해당할 수 있다. 대법원도 2007년 판결에서 수사기관이 범의를 유발해 범죄를 실행하게 한 뒤 공소를 제기한 경우 그 절차가 위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위법한 함정수사로 인정되면 일부 증거가 배제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소제기 자체가 위법하다고 평가돼 공소기각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 수사 과정에서 확보된 증거 역시 위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