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성 전 교도관] 진정한 교도관, P에 대한 단상

소신껏 원칙을 지키던 교도관
세상을 등진 친구를 기리며

 

아내를 전담해 돌보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붙어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 활동량이 줄어들어 체중은 조금씩 늘고, 컨디션도 예전 같지 않아졌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 보니 ‘이러다 정말 병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결심했다. 아내가 아침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시간에 틈을 내어 동네 뒷산이라도 오르기로 한 것이다. 2년 만의 산행이었다.

 

부지런히 걸으면 왕복 1시간 코스인데, 그동안 체력이 부실 해졌는지 절반만 갈 수 있었다. 정상에 있는 팔각정을 찍고 하산하는 길에 운동기구를 비치해 둔 곳이 보였다.

 

근처에는 앉았다 갈 수 있는 벤치가 있었는데, 그 벤치 위쪽으로 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런데 그 소나무의 가지가 뚝 부러져 있었다. 그 부러진 가지를 보니 2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에 뒷산을 오르곤 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서라도 산에 오를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 시간인데도 산에는 항상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 많던 어르신들이 통 보이질 않고 분위기가 묘하게 스산했다. 간혹 보이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정상까지 오른 후 내려가는데 벤치 옆에 있던 소나무의 낮은 가지에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발은 바닥에서 10cm가량 떨어져 있었다. 벤치에는 빈 소주병과 유서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타다 남은 담배꽁초 몇 개가 구르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동네 공원에서 저녁에 아이들과 산책하다가 자주 마주쳤던 내 또래의 남자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였으나 누군가 신고를 한 것 같아 마저 걷고 돌아와 보니, 바닥에 흰 천이 깔려 있었고 과학수사대가 도착해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사업에 실패해 빚을 많이 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몇 달 동안 산에 오르지 못했다. 그 일이 있던 소나무 가지는 부러져 있었다. 부러진 가지를 보며 그 사람이 그때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좋은 세상을 맞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천안소년교도소 시절 함께 근무했던 친구P가 생각났다. 그는 홍성교도소에 서 근무할 때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가족들에게 짐만 되는 신세를 비관하여 5년 전쯤 50대 중반의 나이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매사 뻣뻣하던 녀석다운 선택이라 더 안타까웠다. 그는 한때 사회복귀과에서 근무하며 소년수용자들의 검정고시 업무를 맡았었다. 문제는 그가 맡은 이후로, 그동안 언론에서도 자랑스레 ‘100% 합격’이라고 떠들던 소년수용자 검정고시 합격률이 80%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로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내가 약 올리며 놀리자, 친구는 “교도소까지 와서 커닝하게 놓아둘 순 없잖아?”라고 대꾸했다.

 

“남들 하던 대로 그냥 해”라는 말에도, 그는 단호하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몇 년간 합격률은 낮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원칙을 지켰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원칙이야말로 참된 교정 정신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본 한 기사에서 N 교도소 소년 수용자들 이 3회 연속 검정고시에 전원 합격했다는 내용을 접했다. 물론 좋은 일이고, 수고한 교도관들도 대단하지만, 나는 그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P가 떠올랐다. 그리고 내 마음 한편에는 문득 불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내 친구 P. 세상은 그를 무능하다고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었고, 진정한 교도관이었다는 것을.